시읽는기쁨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샌. 2010. 4. 22. 09:59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내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봄날 저녁은 어디로 갔을까 키 큰 미루나무 아래 강아지풀들은, 낮은 굴뚝과 노곤하던 저녁연기는

나의 옛 캄캄한 골방은 어디로 갔을까 캄캄한 할아버지는, 캄캄한 기침소리와 캄캄한 고리짝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의 옛 나는 어디로 갔을까, 고무신 밖으로 발등이 새카맣던 어린 나는 어느 거리를 떠돌다 흩어졌을까

 

-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지난 주에는 친척 결혼식이 있어 창원에 다녀왔다. 창원까지는 네 시간이 넘게 걸리므로 오가는 길에 읽으려고 김사인 시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가지고 갔다. 시집에는 시인의 성품대로 조용하면서도 따스한 시들이 많았는데 이 시도 그중의 한 편이다. 김 시인은 몇 해 전에 EBS TV에서 시 해설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셨다. 차분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로 알기 쉽게 시를 설명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이번에 결혼한 아이는 사촌 조카의 딸인데 우리 아이들과 나이 또래가 비슷하다. 국악을 전공해서 결혼식장은 흥겨운 우리 가락이 흥을 돋웠다. 어렸을 때 시골 고추밭에 따라와 고추 따는 걸 돕던 꼬맹이가 어느새 커서 시집을 갔다. 그 꼬맹이와 눈부신 드레스를 연결시키려니 아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질주하는 고속버스 유리창으로 쉼없이 불빛이 흘러갔다. 어쩌면 인생은 몽중설몽(夢中說夢) - 꿈 속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 그런 넋두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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