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행복 / 천상병

샌. 2009. 12. 21. 09:55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행복 / 천상병

 

괴테는 자신의 일생동안 행복했던 때는 17시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그 과실을 맛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모욕적이기도 하다. 자급자족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지 않는 한 나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대문명 자체가 사람들이 현실에 불만족하고 미래를 불안해 하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소비와 욕구를 증폭시키는 방법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물질이나 상황에 만족한다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조건에서 일신의 행복을 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기도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천상병표 행복은 비현실적으로 읽혀져 아쉽다. 시인 자신은 독재 권력의 희생양이었다. 심신이 망가진 시인은 행방불명 되었다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고통과 가난을 자신만의 행복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마음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시인의 마음에서 한 가닥 저항정신이라도 읽고 싶은 바람은 있다. 그러나 시인이경험한 고통의 깊이와 무지무욕(無知無欲)의 경지를 이렇게 따뜻한 방안에 누워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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