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날 / 릴케

샌. 2009. 11. 5. 09:19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가을날 / R. M.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 이름을 가만히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시심(詩心)이 저절로 샘솟지 않는가. 릴케야말로 가장 시인다운 이름을 가진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그저 그가 좋았던 건 순전히 이름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십대 시절에 가을이면 이 시의마지막 연을 외우며 괜히 고독한 척 폼을 잡기도 했다. 완성을 지향하면서 고독과 방황을 긍정하는 시의 내용이 가슴에 울렸다.

 

인생이란 석양에 드리운 긴 그림자 하나 벗 삼고 걸아가는 길이다. 젊었을 때는 고독이 뭔지도 모르면서 애써 고독한 척 했다. 낭만적 고독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는 실존적 고독을 체험하게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회피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고독은 선택하거나 피할 성질이 아니다. 누구도 거기에서 도망갈 수 없다. 가을이 말해주는 것은 그 고독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닐까. 고독을 긍정하는 사람이 존재의 근원을 향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릴케는 말한다. 그는 나뭇잎 날리는 가로수 길을 헤매지만 내적으로는 존재의 핵심에 머무는 자이다. 이러니 내 젊은 시절, 가을과 고독과 방황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이것 하나 뿐입니다. 고독! 크고도 내적인 그 고독 뿐입니다.' -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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