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서울의 예수 / 정호승

샌. 2009. 11. 9. 11:10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 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서울의 예수 / 정호승

 

갈릴리의 예수가 2009년 서울에 오신다면 어디에 가야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 예수를 부르는 호칭이헤아릴 수 없이 올려지지만 전혀 예수와는 무관한 세속의 도시, 그 어디에도 예수가 있을 곳은 없어 보인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자신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던 2000년 전의 고독한 예수의 한탄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마 서울의 예수는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이 화려한 밤거리를 외로이 걸으며 울고 있으리라. 아니면 어느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절망의 술잔을 들고 있을지 모른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하리라.

 

그래도 2000년 전 갈릴리의 예수는 희망의 복음을 설파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 억압 받고 핍박 받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병을 고쳐주고,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했다. "복되어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되리니. 복되어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그러나 지금 서울의 예수는 너무나 외롭고 슬프다. 그분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이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어제 미사를 드리며 문득 이 시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엉뚱한 생각 속에서 놀았다. 그분을 찬양하는 예식중에 얼토당토 않게왜 이 시가 떠오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난 경건하고 거룩한 신자가 되기는 그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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