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노팬티와 파타고니아 / 구광렬

샌. 2010. 2. 11. 09:15

꽉 끼는 것에

꽉 끼이지 않기 위해 원시의 땅 파타고니아를 간다

모든 것이 헐렁하다

원숭이도 대충 나무에서 떨어지고

사람들은 *마냐나를 외치며 웬 종일 잠만 잔다

바람은 수 만 년을 방향 없이 불어대고

미친 듯 머리채를 흔드는 들꽃들엔 이름이 없다

아니 각자 좋아하는 꽃에다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이니

너무 많은 이름들이 설렁댄다

동물의 이름 또한 촘촘치 않다

이빨이 있는 고긴 이빨고기

꼬리가 긴 원숭인 긴꼬리원숭이

꼬리가 더 긴 원숭인 긴긴꼬리원숭이....

대평원엔 소떼들이 게으른 목동들을 몰고 다니다

석양 속으로, 석양은 대평원 속으로

대평원은 또 하나 점으로 페이드 아웃되지만

모두 사라질 뿐 돌아오마 기약 없다

 

신은 인간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날개 하나씩을 달아줬다

- 가끔 그 날개는 고통보다 더 무겁다 -

그러나 파타고니아에선 날 필요가 없으니 날개가 필요 없다

날개가 필요 없으니 神도 필요 없다

하지만 팬티만은 벗을 필요가 있다, 꽉 끼지 않기 위해....

 

* 마냐나; 스페인어로 '내일'이란 뜻

 

- 노팬티와 파타고니아 / 구광렬

 

지난주 EBS의 '세계테마기행'은 구 시인이 안내한 아르헨티나 편이었다. 남미의 보석이라는 파타고니아를 중심으로, 세상의 끝인 우수아이아, 모레노 빙하 등이 소개되었다. 원시의 절경이야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천진한 시인의 모습이 그곳의 풍광이나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좋았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마음은 구름 속에 든 것처럼 둥둥 떠오른다. 나도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기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타인의 영상을 보며 대리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인은 파타고니아에서 목동으로 살고 싶어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페인어로 된 시집을 여러 권 낼 정도로 우리나라보다는 스페인 문화권에서 더 인정 받는 시인이시다. 방송에서 본 유창한 스페인어가 다 이유가 있었다. 파타고니아! 노팬티의 나라, 거기에 가면 영화 'Up'에서 본 파라다이스 폭포도 혹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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