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는 이유 / 최영미

샌. 2010. 3. 2. 10:59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에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사는 이유 / 최영미

 

다시 핸드폰의 알람을 ON 시킨다. 30여 년 동안이나 젖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틀 속으로들어간다. 낡고 진부한 삶의 겉옷을 걸친다. "행복한 줄 알아요. 아무도 불러주는 데가 없으면 어떡하려고." 현관문을 나서는 등 뒤에서 아내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신임 인사를 하는 사회 초년생 직원의 미소가 밝다. 그해의 첫마음을 떠올린다. 허공으로 흩어져 간 모든 투명한 것들을 생각한다. 오늘은 소주 한 잔에도 술이 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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