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샌. 2009. 8. 20. 09:56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올 여름에는 여러 편의 공포영화를 보며 집에서 지냈다. 공포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지만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자꾸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었다. 무서운 것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과 생각을 잊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본 영화 중에 '디 아더스'가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알고 보다가 나중에 모두 유령으로 판명되는 반전이 흥미로운 영화였다. 등장인물들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잊고 현실처럼 생생하게 살아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없다. 그것이 꼭 영화 속 얘기만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역시 얼마큼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여기가 진짜 세상이라고? 이 세상도 하나의 환상일지 모른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죽은 도시에서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유령들인지도 모른다. 숨 쉬고, 밥 먹고, 일 하러 나간다고 진정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이곳이 진정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이란 말인가? 오늘 죽어가는 자를 보며 슬퍼하지만 진정 애통해야 할 대상은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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