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샌. 2009. 8. 13. 08:32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훨훨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 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냘픈 총각 애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푸레아지 인 양 매출한 두 다리는
어방없이 날쌘 장난꾸러기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삐 없는 새끼염소마냥
산으로 강으로 내닫는 그 애를 두고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탓 합니다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하지 않는가고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 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 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딩구는데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고
비 올 때면 꽃잎마냥 비도 흠뻑 맞거라
고추잠자리 메뚜기도 따라 잡고
따끔따끔 쏠쐐기에 질려도 보려무나

푸르른 이 땅 아름다운 모든 것을
백지같이 깨끗한 네 마음속에
또렷이 소중히 새겨 넣어라
이 엄마 너의 심장은 낳아 주었지만
그 속에서 한생 뜨거이 뛰어야 할 피는
다름 아닌 너 자신이 만들어야 한단다

네가 바라보는 하늘
네가 마음껏 딩구는 땅이
네가 한생토록 안고 살 사랑이기에
아들아, 엄마는 그 어떤 재간보다도
사랑하는 법부터 너에게 배워주련다
그런 심장이 가진 재능은
지구 우에 조국을 들어올리기에......

- 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체제나 이념의 차이를 떠나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마음에 공감을 느끼는 이 시를 쓴 렴 시인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현재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곱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라고 한다. 한때는 북쪽나라에 도깨비뿔이 달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무서워했는데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민족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도 몇 개의 낯선 용어를 제외하고는 남북의 구별이 없다. 도리어 풋풋한 정서가 경쟁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그렇다. 남북은 겉으로 보이는 차이보다는 공통분모가 더 많다. 이데올로기만 벗어제낄 수 있다면, 지배층의 간교한 술책만 넘어설 수 있다면,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가슴으로 만날 수 있다면, 남과 북이 하나로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를 찢고 나누는 그 모든 껍데기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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