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묵뫼 / 신경림

샌. 2009. 8. 2. 21:52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목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도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 묵뫼 / 신경림

 

묵뫼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어진 무덤을 뜻한다. 산속에는 잡초 우거지고 잊혀진 무덤들 있다. 이젠 봉분마저 희미해졌지만 묵뫼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생전에 부대꼈을 세상사의 시름들 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야 안식이 찾아왔다. 살아있을 때는 원수였던 사람들도 같은 산에 하얀 이마를 맞대고 나란히 누워 있다. 죽어서야 드디어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가 이루어졌다. 꽃을 피우고 새들을 불러 모으면서 산과 한 몸이 되었다.


살아서 애절했던 사연 어디 한둘이었으랴. 간난했던 세상살이 죽어서야 안식을 찾았는가, 묵뫼는 고향처럼 눈물겹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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