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샌. 2009. 8. 29. 08:59

표준어로 유순하게 [김:밥]이라 말하는 것보다

경상도 된소리로 [김빱]이라 말할 때

그 말이 내게 진짜 김밥이 된다

심심할 때 먹는 배부른 김밥이 아니라

소풍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먹었던

늘 배고팠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김빱

김밥천국 김밥나라에서 마음대로 골라먹는

소고기김밥 참치김밥 김치김밥 다이어트김밥 아니라

소풍날 새벽 일찍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밥

내게 귀한 밥이어서 김밥이 아니라 김빱인

김빱이라 말할 때 저절로 맛이 되는

나의 가난한 시니피앙

 

-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시니피앙? 이 말을 모르면 어디 가서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렵다. 그러나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인들은 쉽고 단순한 것을 무척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재주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말에는 개인의 추억과 정서가 묻어 있다. 똑 같은 김밥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다르다. 시인은 [김:밥]보다는 [김빱]에서 유년 시절의 가난과 정을 추억한다. 김밥으로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 정서를 담아내지 못한다. 자장면이 표준말이지만 짜장면이라고 해야 제 맛이 나는것과 마찬가지다. 아빠보다는 아부지라고 해야 내 아버지가 살아난다. 아까시보다는 아카시아라고 불러야 꽃향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런 점이 말이 단순한 과학 기호와 다른 점이다. 같은 기호이지만 말이나 글에는 인간의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으며, 하나의 시니피앙도 수만 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이 사람 사이의 소통과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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