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성병에 걸리다 / 유안진

샌. 2009. 9. 5. 08:58

하느님

저는 투명인간인가 봅니다

바로 앞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듯이 여깁니다

불쾌하고 기분 나빠

'있다'고 '나'라고 주장하다가 지쳐 그만

성병(聲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도처럼

순교(殉敎)를 영광과 환희로 맞았던 초기 기독교도처럼

명성을 영광과 환희로 맞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복할 수 없어서 국교(國敎)로 삼아버린 로마제국처럼

제가 정복할 수 없는 명성(名聲)은

저의 종교가 되었나 봅니다

 

정복할 수도 정복될 수도 없는

성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며 기만했으며

꿈과 성병을 구별하지 못했던가를

선망과 조롱으로 우습게 보았던 타인과 자신을

사람 본래로 보게 눈 열어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을

저만은 반드시 살아서 고쳐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 성병에 걸리다 / 유안진

 

제목만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육체의 그 성병이 아니라 시인이 말하는 것은 명성을 갈망하는 마음의 병이었다. 식욕이나 성욕 같은 생명욕 다음으로 강한 인간의 욕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라고 한다. 명예욕이라는 것도 실은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권력이나 돈, 또는 고결한 인품이나 높은 학식을 원하는 것은 모두 타인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욕망이 그러하듯 이것 역시 지나치면 화가 되고 병이 된다. 특히 성병이 무서운 것은 '나'[ego]에 대한 과대한 집착이 자신을 위장하고 속이고 기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의 본래 모습을 가리고 허상에 빠지게 한다. 시인이 '나'와 '있다'를 강조한 것은 역설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나'가 없는데 상대방이 무시한다고 불쾌하거나 기분 나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자아가 없다는 뜻의 무아(無我), 장자에서 자아를 넘어서는 망아(忘我)개념과 같다. 결국 시인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 깨침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장자에 나오는 한 예화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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