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오래된 물음 / 김광규

샌. 2009. 9. 2. 13:18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 오래된 물음 / 김광규

 

쓰레기터에서도 라일락이 피고, 흙을 아스팔트로 덮어도 작은 틈만 있으면 풀이 돋아난다. 인간의 어두운 자궁 속에서는 여전히 아기의 고운 미소가 자란다. 그 원초적 생명력을 막을 자는 없다. 세상이 암담해 보여도 생명은 죽지 않는다. 도리어 더욱 싱싱하고 억세게 꽃을 피운다. 절망이 절망이 아닌 것은 생명에 내재된 이런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생각할수록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빨리 퇴직하고 싶다고 푸념을 늘어 놓았더니 어떤 분이 말했다. "젊은 기(氣)가 가득한 교실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네." 정말 그렇다. 새싹들이 자라고 있는 교실은 팔팔하게 살아 있다. 병원이나 법원이나 양로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동하는 에너지가 있다. 밟히고 짓눌려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살아있는 힘, 그 싱싱하고 순결한 생명력을 접할 때면 감격에 몸이 떨린다. 세상은 놀랍고도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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