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샌. 2005. 10. 17. 12:28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수나무가 서 있고

누렁 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하, 참 이 가을엔

햇빛의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사무실 앞 가을 햇살 따스한 곳에서 동료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느냐며 짐짓 물으니 광합성을 하고 있는 중이란다. 그 대답이 일품이다. 가을은 이 햇살과 하늘만으로도 더없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햇살은 투명하고, 하늘은 맑고, 대기는 청명하다. 이런 날은 인공 조명의 사무실을 벗어나 맑은 햇살 아래서 식물성 광합성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동물성 욕망은 잠재우고 저 맑고 투명한 햇살로 내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싶다.

 

표현 하나 때문에 특별히 기억되는 시가 있다. 이 시에서 가을 햇빛의 투명함을 '햇빛의 뼛속까지 보이는' 것으로 그린 것이 그러하다. 뼛속까지 보이는 햇빛이라는 표현이 너무나 재미있다.

 

자꾸만 창 밖으로 시선이 날아가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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