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마흔 살의 동화 / 이기철

샌. 2006. 3. 7. 14:08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묻는

산노루 되어 나는 살겠네

 

- 마른 살의 동화 / 이기철

 

나이 들어 어른이 될수록꿈은 점점 사라지고,마음 속에서 슬픈 메아리만 울리고 있다. 지금은 아파트 열쇠 한 개를 버리기에도 주저되는, 스스로 짊어진 멍에가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동화의 꿈을 꾸고 있을 때가 행복하다. 마흔 살이 넘어도 동화의 꿈을 간직한 사람은 아름답다.

 

나에게도 언젠가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날 때가 찾아올 것이다.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모두 버리고 한 줄기 허허로운 솔바람 되어 그 땅에 들 날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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