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기도 / 십자가의 성요한

샌. 2006. 3. 1. 11:40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가지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온전이신 당신께 헤살놓지 않는 법

 

어느 것에 네 마음을 머물러 두면

'온전'에게 너 자신을 못 맡기나니

'온전'까지 온전히 다다르려면

모든 것에 온전히 너를 끊어야

온전이신 그분을 얻으려 할 때

아무 것도 얻을 맘이 없어야 하니

모든 것의 무엇을 가지려 하면

주님 안의 네 보배를 지니지 못함이다

 

- '가르멜의 산길' 13장 / 십자가의 성요한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가르멜의 산길'에 나오는 이 글이 나의 기도였었다. 나를 비우고 그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주문처럼, 매일 아침 이 글을 외우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 그리고 사순 시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나를 비우는 일, 무심(無心), 무욕(無慾)이라는 말이 과연 가능할까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절대선(絶對善) 또는 인간의 두뇌로 헤아리지 못하는 신비(神秘)에 대한 외경심은 아직도 내 마음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다만 이제는 내 영혼의 그릇만큼만 그분께서 허락해 주시길 바랄 정도로 닳고 영악해져 있다.

 

맹목적이었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초심(初心)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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