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샌. 2005. 12. 16. 12:51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 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평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안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 흙이 되고 싶어요

 

-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어제 저녁, 전교조 지역 송년 모임에서 교사 노래패인 '해웃음'이 나와 이 노래를 선사해 주었다. 노래로 듣는 가사에 괜히 가슴이 찡해졌다.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꿈은 나에게는 현실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미래의 희망으로만 존재해 왔다. 이젠 그 꿈마저 빛이 바래고 퇴색되어 예전의 순수했던 색깔을 찾기도 어렵게 되었다. 맑은 목소리의 노래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자리를 옮겨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는 다른 선생님들의 교육에 열정으로 자리가 뜨거웠다. 그리고 내 자신의 안일만 추구하는 이기성이 드러나 몹시 부끄러웠다.

 

늦게 집에 돌아오니 황우석 교수의 가짜 줄기세포 확인 소식에 술이 깨어 버렸다. 황우석 신드롬에 비판적이었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잠이 안 와서 사학법 개정에 대한 토론 프로까지 보고 두 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질식할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도 그렇다 / 나태주  (1) 2005.12.26
박달재 아이들 / 김시천  (0) 2005.12.20
성가족 / 임영조  (0) 2005.12.11
장선리 / 양문규  (2) 2005.12.07
우리도 쿠바의 새들처럼 / 서정홍  (3) 2005.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