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샌. 2005. 11. 25. 08:57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 것들 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 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버린 것은 누구인가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 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 휘말려

한 평생을 던져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 다시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옛날에는 모든 남자들이 광활한 들판과 숲속을 내달리던 전사요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야성은 퇴화한 꼬리뼈에만 남아있고, 남자들은 한 줌의 쉽게 구할 수 있는먹이을 위해 애교를 부리는 애완용 고양이가 되어 있다. 그들은 가끔씩 발톱을 세우지만 어디에 써야할 지는 모른다.

 

야성(野性)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자연 회귀의 본능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시인이 기다리는 '야성의 사나이'는 오히려 남자들이 더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성(自然性)에는 거친 야성적인 남성성(男性性)과 함께 부드러운 여성성(女性性)도 포함되어 있다. 남성성이 강함과 정복과 파괴를 상징한다면, 여성성은 부드러움과 치유와 창조를 의미한다.

 

지금까지가 남성성의 시대였다면 이제부터는 여성성의 시대가 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업문명은 남성성의 원리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여성적인 문명으로 변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으러 가는 길이 막혀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숫컷들은 이제 전자 화면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스포츠를 관람하며 옛날의 향수에 젖는다.

 

그러나 이 쓸쓸한 시대를 구원할 영원의 여성이 다가오는 부드러운 발걸음 소리가 지금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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