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샌. 2005. 11. 11. 12:35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1994).

목사님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셨다.목사님은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일신을 바치셨는데, 이 시의 포효처럼 발바닥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 바탕은 신앙인으로서 몸소 앞장 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신앙의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목사님은 대승적 기독교, 나아가 불의에 맞서서 정의를 지켜내는 적극적 사랑을 보여주셨다. 특히 가톨릭과 개신교의 일치를 위해 공동성서의 번역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신 것도 기억 난다.

 

문익환 목사님의 삶과 이 시를 연관시켜 보면 시가 주는 감명은 더욱 남다르다. 이렇게 몸과 발로 쓰여진 시는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이 시의 이해를 위해서 나희덕 시인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1994년, 시인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바로 발길을 돌려 병원 영안실로 갔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술국을 떠넣으며 이어지는 고인에 대한 회고담과 함께 지나간 시대에 대한 회한 섞인 얘기가 한창 오고갈 때였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들어서더니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하길, 문목사님은 평소에 한 켤레 이상의 구두를 갖지 않았고, 그것이 다 닳아 헤질 때까지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고인이 생전에 신던 구두였다. 나는 그 사람이 들어 보이는 구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구두는 몹시 낡았고 굽도 반 넘게 닳아 있었다. 특히 굽 한 쪽이 더 심하게 닳아 있어서 몸이 기우뚱거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흔히 말이나 얼굴은 속여도 손은 속일 수 없다고 하지만, 손보다도 발은 더 속일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 그 낡은 구두 한 켤레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신발장에 처박힌 내 여러 켤레의 구두를 떠올렸다. 옷이나 모임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갈아신던 구두들. 더러운 진창은 되도록 피해다니며 아스팔트 위의 마른 먼지나 묻히고 살아온 구두들. 한번도 정해진 궤도나 안전한 삶의 울타리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구두들. 그 구두들이 증명해줄 나의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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