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샌. 2006. 1. 31. 16:18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어지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하고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깎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임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가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 백석

 

백석의 시에서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한국적인 한(恨)이나 슬픔을 넘어선, 어떤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외로움이고 쓸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현실의 간난 때문은 아니다. 동시에 백석의 시에는 높고도 고결한 지조가 들어있다.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대쪽 같은 선비정신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여기서는 눈을 맞으며 서있는 갈매나무로 상징화 되어 있다. 이런 순결한 정신의 갈매나무가 있음으로써 백석의 시는 빛을 발한다.

 

사는 일이 힘들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커 외롭고 쓸쓸할 때, 이 시는 늘 내 친구가 되어 준다.

부끄러움도 화도 어리석음도 가라앉고, 뭔가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게 한다는 시인의 말은 체념이 아니라 텅 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긍정의 통찰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나에게는 현실에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외로움과 쓸쓸함을 동무삼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어 주게 한다.

 

오늘은 겨울산에 외로이 서서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눈을 맞고 있을그 곧고 정한 갈매나무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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