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파장 / 신경림

샌. 2004. 2. 2. 11:39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서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켤레 또는 조기 한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罷場 / 신경림 >


옛날의 시골장은 농촌 사람들의 축제 마당 역할을 했다.
고된 농사일을 잠시 멎고, 폐쇄된 마을 문화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 소식을 나누고 인정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어릴 적 기억에도 장날이 되면 어머니는 새 옷을 곱게 입고 머리에는 뭔가를 이고 동네 아낙들과 같이 장 나들이를 가셨다.
집을 나서는어머니의 얼굴은 유난히 밝고 예뻤다. 그 날은 아이들도 덩달아 설렜다. 장날 아침이면 집집마다 의례 따라 갈려고 떼를 쓰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쩌가다 행운이 찾아오면 어머니를 따라가기도 했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던 그곳까지는 1시간여를 걸어야 했다.
철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내를 건너고, 그리고 논밭을 지나고 과수원길을 지나면 장터가 나타났다. 멀리서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는 그 거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벌써 가슴은 두근거렸다.
초입에는 길 양쪽으로 곡식을사려는 아주머니들이 진치고 있다가 머리에 인 보퉁이를 빼앗다시피 했다. 거기를 통과하면 이제 눈요기거리가 엄청 많았다.
간난했던 시절, 장터는 갈증을 채워주던 어린 시절의 꿈의 장소였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장터의 뒤에 숨어있는 삶의 고단함이나 사람들의 쓸쓸함을 눈치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생의 한 고비를 넘어선 이제야 비로소 그 때는 보이지 않던 장터의 구석지고 그늘진 곳이 따스한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시는 아무래도 첫 줄이 자꾸 눈길을 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는 풍경이다. 그러나 미소로만 넘어갈 상황만도 아닌 것 같다. 이 시의 매력은유머러스하게 표현된 이런 부드러움에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은 장터라는 과거의 배경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미 사라져버린 정서이기도 하다.

잘난 놈들이라면 서로 얼굴만 보고서 흥겹지는 않을 것이다.
전에는 잘난 놈이 되려고 무진 애를 많이 썼다. 경쟁에서 이겨야 했고, 도태되지 않으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했다. 학교도 사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살아보니 삶이란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맹목적으로 따르던 가치들이 어느 날무슨 의미를 가지느냐고 물어오고는 했다.
이젠 도리어 못난 놈으로 살아보고 싶다.
그러나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바보같이 산다는 것은 더욱 지난한 일이다.
마음 속에 새겨진 먹물과 욕망이 이렇게 꿈틀대고 있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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