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작은 사내들 / 김광규

샌. 2003. 12. 2. 15:33

작아진다
자꾸만 작아진다
성장을 멈추기 전에 그들은 벌써 작아지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전쟁을 헤아리며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작아진다
하품을 하다가 뚝 그치며 작아지고
끔찍한 악몽에 몸서리치며 작아지고
노크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 놀라 작아지고
푸른 신호등 앞에서도 주춤하다 작아진다
얼굴 가리고 신문을 보며 세상이 너무나 평온하여 작아진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
모두가 장사를 해 돈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
제복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작아지고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작아지고
수많은 모임을 갖고 박수를 치며 작아지고

권력의 점심을 얻어먹고 이를 쑤시며 작아지고
배가 나와 열심히 골프를 치며 작아지고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
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
작아졌다
그들은 마침내 작아졌다
마당에서 추녀 끝으로 나는 눈치 빠른 참새보다도 작아졌다
그들은 이제 마스크를 쓴 채 담배를 피울 줄 알고
우습지 않을 때 가장 크게 웃을 줄 알고
슬프지 않은 일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은 깊숙이 숨겨둘 줄 알고
모든 분노를 적절하게 계산할 줄 알고
속마음을 이야기 않고 서로들 성난 눈초리로 바라볼 줄 알고
아무도 묻지 않는 의문은 생각하지 않을 줄 알고
미결감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다행함을 느낄 줄 알고
비가 오면 제각기 우산을 받고 골목길로 걸을 줄 알고

들판에서 춤추는 대신 술집에서 가성으로 노래 부를 줄 알고
사랑할 때도 비경제적인 기다란 애무를 절약할 줄 안다
그렇다
작아졌다
그들은 충분히 작아졌다
성명과 직업과 연령만 남고
그들은 이제 너무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다

< 작은 사내들 / 김광규 >


어제 저녁 TV로 인간극장을 보았다.
제목이 `길 위의 화가`였던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 바람같이 물같이 살아가는 영혼의 이야기였다.
그는 들판에서 바람과 함께 춤추고, 바다에서 파도와 함께 춤추고있었다.

그와 대비가 되어서일까
밤중에 문득 깨어난 시간, 낮에는 숨겨져 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인간적 성숙이란 허울일 뿐이었다. 내면에서는 병들어 가는 영혼의 비명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태초에는 모두 자유로웠고, 아름다웠고, 그리고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우주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유년 시절이 아마 그와 비슷했을 것이다. 그 당시야말로 우리는 거인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엇일까?
꿈과 무지개를 잃어버리는 것? 춤추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 영악스럽고 속물적이 되는 것?.......

나는 어느 길 위에서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가면과 위선을 걷어내고는 그 환한 빛과 어울려 황홀한 한 판 춤을 춰볼 수 있을까?

언제일까? 그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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