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인생 / 이기철

샌. 2024. 12. 2. 10:53

인생이란 사람이 살았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 인생 / 이기철

 

 

그냥 첨벙 뛰어들었는데 인생이었다

언제나 눈앞에선 보이지 않고

뒤돌아보아야 보이는 그것

우편행랑으론 배달되지 않고

발끝에 머리 위에 모래처럼 쌓이는 그것

아무리 화사해도 빌려 입을 수 없는 그것

도서관에 가면 있지만 모두 남의 것인 그것

때론 놓친 기차 같이 아쉽고 못 잡은 무지개 같이 설레는 그것

왜 우는지도 모르고 명사산 모래처럼 우는 그것

죄짓지 않고도 성서와 불경처럼 무릎 꿇게 하는 그것

먹는 일 입는 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로 짠 피륙인 그것

사람들이 흔히 열 권 소설로도 모자란다고 하는 그것

때론 유행가처럼 절실한 그것

봉숭아씨처럼 뛰어나가지 못하고 살구씨처럼 문을 잠근 채 토라진 그것

불행보다는 달콤하고 행복보다는 쓰디쓴 것

아무에게도 배울 수 없고 누구도 가르치지 않는 것

빙벽 등반처럼 아슬아슬 제 힘으로 올라야 하는 것

재봉틀로 수선할 수 없는 것

제 손으로 버려야 하는 것

낮에는 죄를 짓고 밤에는 참회록을 읽게 하는 그것

벽돌 한 장만 잘못 뽑아도 집 전체가 무너지는 그것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내가 모래가 되는 그것

그만 놓아 버리고 싶은데 끝내 놓은 수 없는 그것

닦아도 씻어도 걸레처럼 얼룩이 남는 그것

눈앞에는 없고 등 뒤에만 쌓이는 그것

비범한 사람들의 걸어간 발자국을

부지런한 어느 펜이 평전에 담는 그것

소설로 쓰면 생생하고

시로 쓰면 진부한 그것

 

- 인생 사전 / 이기철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근원적인 질문을 고갱은 그림 제목으로 붙였다.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인생의 비의를 찾아 고뇌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안갯속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묻기는 하지만 답을 애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온 곳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것. 오로지 "너는 무엇이냐"라는 질문만 의미가 있는 그것.

 

새벽에 내린 비로 눈이 많이 녹았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옅은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아침이다. 손에 받쳐든 찻잔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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