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삶 / 박경리

샌. 2024. 11. 18. 11:32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꽃

파고드는 벌 한 마리

애닯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럽다는 고들빼기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 삶 / 박경리

 

 

통영 미륵산 자락에 있는 박경리기념관 뜰에 이 시가 적힌 시비가 있었다. 작가가 생의 마지막에 쓴 시들에서는 소설에서 읽지 못하는 작가의 진솔한 마음을 만난다. 작가에게 다가가는 데는 소설보다 시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한 인생이 농축되어 있는 작가의 시에는 고운 영혼의 향기가 풍긴다. 그 향기는 내 마음으로도 스며들어 따스하게 위무해 준다.

 

작가의 시는 쉽다. 아무 기교도 없다. 시가 주는 향기처럼 작가의 삶도 간결하고 담박했을 것이다. 기념관에서 받은 느낌도 그랬다. 위대한 작가이기 이전에 아름다운 한 인간을 만났다.

 

작가의 다른 시 한 편이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 일 잘하는 사내 /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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