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
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
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
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
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
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
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
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
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
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
당산나무 아래 널부러져 있어야 제격이다
시인 천상병이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안 가고
나뭇덩걸에 걸터앉아 손바닥에 시를 쓰고
그 발치쯤엔 키다리 시인 송상욱이 사흘 굶은 낯으로
통기타를 쳐야 제격이다
주막은 때로 주먹패 산도적이 공짜 술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제격이다
주막, 주먹 왈패 풍각쟁이 벙거지들이 다 모인 酒幕
지까다비 면소사 고지기 벌목장들이 그냥은 못 가고
탁주 한 잔에 음풍농월 한가닥 하고야 가는 酒幕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인생에 진 사람들이
인생의 얼굴을 몰라 아예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명 베옷 기운 등지게 자락을 보이며 떠나가는 酒幕
- 주막(박달재에서) / 이기철
나는 주막 세대는 아니다. 이 시에 일본어가 나오는 걸 봐서 일제시대 때까지가 주막의 전성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뒤로는 주점, 술집으로 어휘가 변했다. 같은 술을 팔아도 주막, 주점, 술집은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 하물며 시인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으로 써야 맛이 산다고 하지 않는가.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 주먹패, 산도적, 왈패, 풍각쟁이, 벙거지, 지까다비, 면소사, 고지기, 벌목장 - 주막에 모여들던 온갖 인간 군상들의 직업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세상이 천지개벽한 것이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있는데, 요사이 아이들은 외래어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전을 찾아 뜻을 다시 확인해 본다.
장돌뱅이: 여러 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수
선무당: 서투르고 미숙한 무당
미투리장수: 짚신장수
등짐장수: 일용품 따위의 물건을 등에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
소금쟁이: 소금을 팔러 다니는 사람(?)
도붓장수: 이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
요술쟁이: 요술을 부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
곡마단: 곡마와 요술 따위를 보이는 흥행 단체
전기수(傳奇叟): 이야기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사람
주먹패: 폭력을 일삼는 무리
왈패: 말이나 행동이 단정하지 못하고 수선스럽고 거친 사람
풍각쟁이: 시장이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여 돈을 구걸하는 사람
벙거지: 병졸이나 하인이 쓰던 모자. 즉, 신분이 낮은 사람
지까다비: 작업화(노동자를 가리키는 말인 듯)
면소사: 면사무소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고용한 사람
고지기: 건물이나 물품 따위를 지키고 감시하던 사람
벌목장: 벌목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
주막 문화를 경험하지 않았으니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다. 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전에 고향을 오갈 때는 박달재와 죽령을 지나다녔다. 예전에 주막이 있던 대표적인 곳이지만 지금은 이름만 주막으로 영업을 하지 영 아니올씨다였다. 옛 주막을 재현해 놓은들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주막에는 주막에 어울리는 사람이 들락거려야 酒幕이 되는 것이다.
100년이 안 되는 사이에 많은 것이 떠나갔다. 시의 끝 부분처럼~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인생에 진 사람들이
인생의 얼굴을 몰라 아예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무명 베옷 기운 등지게 자락을 보이며 떠나가는 酒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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