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 문학상을 발표하며 한강 작가의 소설을 '시적(詩的) 산문'이라고 표현했다. 한강 작가가 시로 문단에 데뷔했으니 소설에 운문의 리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작가는 대학생 때 정현종 시인으로부터 '시 창작론'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30년 전이지만 정 시인은 그때 한강 학생이 준 강렬한 인상을 기억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래선지 한강의 이 시는 정 시인의 시풍과 닮지 않았나 싶다. '흰' 공기, '흰' 밥, '흰' 김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 존재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은 스치며 흘러 지나간다. 하지만 명멸하는 찰나 중에 존재의 귀함이 숨어 있지 않은가. 그저 덧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흰'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다. 허무를 직시하고 긍정할 때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임을 알게 되지 않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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