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바람의 집 / 이종형 어제가 제주 4.3 사건 76주년이었다. TV로 추념식을 보며 이념 갈등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의 ..

시읽는기쁨 2024.04.04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 박노해

일단 꼬박꼬박 밥 먹고 힘내기 깨끗이 차려 입고 자주 웃기 슬프면 참지 말고 실컷 울기 햇살 좋은 나무 사이로 많이 걷기 고요에 잠겨 묵직한 책을 읽기 좋은 벗들과 좋은 말을 나누기 곧은 걸음으로 다시 새 길을 나서기 -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 박노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인생살이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골인 지점의 테이프를 제일 먼저 끊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승자는 한 명이고 나머지는 들러리다. 허겁지겁 달리다 보면 넘어지고 깨져서 상처가 아물 틈이 없다. 그 와중에 "세상은 일등만 기억합니다"라는 잔인한 문구를 광고로 쓴 기업도 있었다. '다시 꿋꿋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세상의 북소리에 맞춰 달음박질을 계속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질주하는 무리에서 벗어나 ..

시읽는기쁨 2024.03.25

딸년을 안고 /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 딸년을 안고 / 김사인 선거철이라고 온갖 장밋빛 공약이 넘쳐난다. 국회의원 후보는 그렇다치고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발 약속을 하면서 돈을 퍼주겠다고 난..

시읽는기쁨 2024.03.17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시읽는기쁨 2024.03.11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한낮에 내리는 눈을 본다. 살포시 내리는 작은 눈송이는 땅에 닿자마자 녹으면서 흔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체에서 액체로 상태만 변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젊었을 때 이 시를 만났다면 '임'은 그리..

시읽는기쁨 2024.03.02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시읽는기쁨 2024.02.25

겨울밤 /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겨울밤 / 박용래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단 네 줄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고향을 떠나온 지 긴 세월이 흘렀고,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자주 찾아오는 나이가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년의 고향 집 겨울은 따스하다. 시인의 시대로부터 그리 많은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이제 그런 고향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이고, 누군가에게는 찾아가더라도 이미 사라진 고향이 되었다. 기억 속 고향과 현실의 고향은 괴리가 너무 깊다. 그런 불협화음이 우리를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 고향을..

시읽는기쁨 2024.02.17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

시읽는기쁨 2024.02.07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성리학자다. 고려가 망해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혔다. 선생의 나이 40세 때 고려가 망했고, 교분이 두터웠던 이방원이 그를 개경으로 초대하여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뿌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응하기만 했다면 부귀영광은 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이 시조는 이방원의 초청으로 옛 왕도였던 개경을 방문했을 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초야에 묻혀 곧게 살아간 선생의 맑은 기상이 드러나는 한시 '한거(閑居)'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개울가..

시읽는기쁨 2024.01.29

사랑일기 / 하덕규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속을 달려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저 지친 어깨 위에 시장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아무도 없는 땅에 홀로 서 있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 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 사랑일기 / 하덕규 2016년에 밥 딜런이 노..

시읽는기쁨 2024.01.08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 새해 인사 / 나태주 2024년 새해가 열렸다. 꿈 없이 꿀잠을 자고 난 첫날 아침이다.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설레는 소년이 되어도 본다. 그러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글자가 환등기의 영상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빈 손'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시인의 새해 ..

시읽는기쁨 2024.01.01

사친(思親) / 사임당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雙輪月 鏡浦臺前一陳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每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 사친(思親) / 사임당(師任堂)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각별했을 것 같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품인지라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리라. 사임당은 열아홉에 혼인을 한 뒤 7남매를 키우며 파주와 한양에서 살았다. 쪼들리는 살림을 꾸리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동안 ..

시읽는기쁨 2023.12.24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귀가 따가워도 이 동네 매미가 다 저러는 건 아닐 거야 날개를 비비다 말고 가만히 쉬는 매미가 있을 거야 어쩌면 수줍음 많은 매미도 있을지 몰라 그런 매미 좋다고 찾아오는 암컷도 있을지 몰라 -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매미의 울음소리는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세레나데다. 암컷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소리를 내야 유리하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절한 생존경쟁인 셈이다. 땅 속에서 10년 정도 애벌레로 살다가 지상으로 나온 매미는 고작 한두 주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필사적인 매미의 외침이 이해될 만하다. 한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 중에서 혹 엉뚱한 매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매미일 수도 있고, 내가 왜 소리를 내야 하는지..

시읽는기쁨 2023.12.22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23.12.12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 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어떤 적막 / 정현종 쓸쓸함이 그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시든 꽃팔찌를 바라보는 내 탓도 아니다. 쓸쓸함은 존재의 근원에서 퍼져 나가는 둥근 파문이 아닐까. 너와 나의 파문이 만나면 우리 마음은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만든다. 그 보이는 형상이나 이미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아예 한 몸이 되시는구나. 우주가 수..

시읽는기쁨 2023.11.29

탄로가 / 신계영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만 하아랴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 소년 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 탄로가(嘆老歌) / 신계영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신계영(辛啓榮, 1577~1669) 선생이 쓴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다. 자신의 소년 시절과 비교하며 세월의 무상을 절감하는 노인의 심경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선생은 9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한 셈이다. 노년의 아픔과 쓸쓸함을 몸소 체험한 바가 컸을 것이다. 나도 이제 선생의 마음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시읽는기쁨 2023.11.22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

시읽는기쁨 2023.11.14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시읽는기쁨 2023.11.06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 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과 믿음을 노래한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일에 세상을 뜨셨다. 향년 96세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를 쓰셨고, 3년 전에는 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올봄에는 시화전까지 열 정도로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동을 했는데 돌연 부음이 들려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인은 종교적 경건함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을 향한 사랑을 찬미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

시읽는기쁨 2023.10.18

급훈 뒤집기 / 박완호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는 별을 마주치게 되리 - 급훈 뒤집기 / 박완호 불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법연(法演) 선사가 세 제자와 함께 밤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자 사위가 칠흑으로 변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의 수행력을 알아볼 셈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시읽는기쁨 2023.10.10

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 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 기차표 운동화 / 안현미 조용히 추석이 지나갔다. 추석 귀성을 안 하게 된 지도 네 해째가 되었다. 가벼워지긴 했지만 뭔가 허전하다. 그 빈 구석을 중국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게임 경기를 보며 채웠..

시읽는기쁨 2023.10.02

벚나무 잎이 천천히 떨어지며 남기고 간 사소한 것들 / 김산

앞마당의 벚나무 잎이 작은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진다 큰 빗자루를 들고 떨어진 잎들을 쓸기 시작하면 바스락거리며 오그라든 당신의 지문이 조각조각 바서진다 바람과 빛과 물이 일제히 분열하며 공중으로 흩어진다 검지까지 쭉 뻗은 감정선과 손목으로 가다 끊긴 생명선 그래, 생각이 많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말은 틀림없다 빗자루가 쓸리면서 빗자루가 아플 것이라는 생각에 빗자루질을 멈추고 떨어지는 잎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겨우겨우 붙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벚나무 잎을 보면서 어디서 불어왔는지 찬바람이 오른뺨을 할퀴고 간다 뺨으로 누구를 때렸다거나 해코지를 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 기껏해야 뺨은 누군가의 뺨을 비비거나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잠시 온기를 나누는 게 다일 뿐, 다시 빗자루를 잡고 떨어진 벚나무 잎들을 쓸..

시읽는기쁨 2023.09.20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없소? / 김영남

오두막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름다운 오두막집. 그런 오두막을 장만하면 나는 호롱불의 불편함도 편안함으로 여기며 살리라. 낮이면 하얀 산꽃들로 나의 내부를 살피고, 밤이면 벽에 돋은 긴 그림자의 높이로 나의 밖을 위로하며. 겨울이 되면 위로할 게 더 많아지겠지? 눈이 오면 토끼, 노루들이 밖을 서성이겠지? 이들과는 가을 달빛에 익은 고구마를 같이 나누고, 눈길의 얼음장 깨고 옹달샘도 함께 하리라. 그러면 이들은 나와 한 마음을 정답게 이루는 훈훈한 저녁 연기요, 반가운 아침 인사가 되겠지? 사소한 것들이 사소하지 않게 날 괴롭혀올 때면 나는 깊은 산중의 허름한 오두막집으로 떠나고 싶다. 내 영혼과 단둘이 밥상 마주할 수 있는 오두막집으로. - 누가 이런 오두막집 되어줄 사람..

시읽는기쁨 2023.09.08

인간 / 유자효

같은 종을 죽이는 종 닮으면 닮을수록 더욱 잔인하게 죽이는 종 마침내 제 터전마저 허무는 종 제 새끼들이 살아야 할 터전까지도 제멋대로 없애버리는 종 마침내 자살로 멸종의 길로 가는 이 세상에 전례가 없는 희한한 종 똑똑한 체하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종 - 인간 / 유자효 대학생 때 생물학 시간을 좋아했다. 담당 교수님이 다양한 생물의 생태를 '동물의 왕국' 이상으로 흥미롭게 설명해주셨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얘기 중 하나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산다는 레밍이라는 쥐다. 번식력이 좋은 레밍은 어느 시기가 되면 집단으로 이동하다가 해안가 절벽에 이르러 모두 바다로 떨어진다고 한다. 일종의 집단 자살이다. 이유는 아직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신기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시를 읽다가 레밍이 ..

시읽는기쁨 2023.08.29

공짜 / 박호현

선생님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공짜는 정말 많다 공기 마시는 것 공짜 말하는 것 공짜 꽃향기 맡는 것 공짜 하늘 보는 것 공짜 나이드는 것 공짜 바람소리 듣는 것 공짜 미소 짓는 것 공짜 꿈도 공짜 개미 보는 것 공짜 - 공짜 / 박호현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더니 열 살도 안 된 아이의 글이 큰 깨우침을 준다. 가만히 돌아보면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은 전부 공짜가 아닌가. 나도 공짜 목록을 적어보며 불평하는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어느 노래 가사에도 이런 게 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온 놈이 이만큼 가졌으면 부자가 아닌가.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에 결핍을 느낄 ..

시읽는기쁨 2023.08.21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고독사에 대한 보고서 / 공광규

시골 재당숙이 혼자 살다 돌아가셨다 집안 역사교과서 한 권이 동네 이야기책과 지적도 한 책이 신명꾼 하나가 사라졌다 혈관부에 피가 돌던 굽은 나무 한 그루가 평생 동네를 떠나본 적 없는 말뚝 하나가 뽑혔다 매일 아침 열리던 대문이 며칠째 닫혀 있자 독거노인 둘이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산비탈에 황토 구덩이를 파놓고 대전으로 부검 받으러 떠난 시체를 기다리는 노인들 혼자 살다 죽으면 칼로 배가 갈려 한 번 더 죽어야 한다며 노을이 번질 때까지 투정하는 인부들 땅을 향해 몸이 자꾸 꼬부라지는 노인들이 겨우겨우 무덤 가까이에 친 천막에 올라와 고인이 나이롱 뽕을 좋아하고 '갈대의 순정'이 십팔번이었다고 회고했다 동네에 들어와 사는 타지 출신 중늙은이 몇과 시골노인들이 보는 앞에서 관을 들고 비탈에 올라 청태산 ..

시읽는기쁨 2023.08.09

이런 삶의 대학 하나 세우는 꿈 / 김예슬

우리 대학은 입학시험이 없다. 우리는 졸업장도 자격증도 없다. 당연히 교수도 캠퍼스도 없다. 입학시험은 없지만 진정한 자신을 살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 필요하다. 졸업장과 자격증은 없지만 일생을 함께할 자신감과 좋은 벗들이 주어진다. 교수는 없지만 숨은 현자와 장인과 토박이 지성들이 우리의 교수다. 캠퍼스는 없지만 온 국토와 지구마을과 삶의 현장이 우리의 캠퍼스다.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 발목이 시리도록 대지를 딛고 계절의 길을 거닐며 야생자연을 탐험한다. 자기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 치유할 줄 아는 건강법을 익힌다. 지감각을 되살리고 민감한 감성으로 절정체험의 순간을 느낀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꾸며 적은 소유로 기품 있게 사는 법을 익힌다. 우정과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슬픔과 고통을 다루는 ..

시읽는기쁨 2023.07.31

나의 행복 /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돈은 아내가 벌고 나는 놀면서 지내니까!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딱 싫고 그저 KBS 제1FM방송. 이 방송은 거의가 고전음악인데 고전음악광인 나는 그래서 행복의 진짜 맛이다. 막걸리 한 되 한 병을 매일같이 마누라가 사준다. 한 병을 정오에 사면 6시까지 가니 어찌 탓하랴?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거리랑 없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어기겠습니까? 행복은 충족이다. 나 이상의 행복은 없고, 욕망이라고는 없으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행복 / 천상병 시인의 나이 쉰셋이면 1982년에 쓴 시로, 의정부 장암동에 있던 허름한 집에 살던 시절이다. 여느 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다. 천상병표 행복..

시읽는기쁨 2023.07.26

섬집 아기 / 한인현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 섬집 아기 / 한인현 이 동시가 194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는 해방 직후의 혼란하고 궁핍한 시대였다. 시의 배경도 외딴섬의 외딴집에 사는 가난한 엄마와 아기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나갔거나 아니면 없는지도 모른다. 이 동시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동요로 만들어졌다. 아기를 혼자 집에 남겨 두고 굴 따러 나온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갈매기 울음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로 들렸을지 모른다. 맘이 설렌 엄마는 굴 따는 걸 그만두고 갯벌을 가로질러..

시읽는기쁨 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