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8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두 눈을 깊게 뜨고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첼로를 켜며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이 불이 되는 날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부터 떠오르는 아침이면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달력 속에서 뚝, 뚝,꽃잎 떨어지는 날이면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나는 너에게로 가까..

시읽는기쁨 2024.07.09

혼자 논다 / 구상

이웃집 소녀가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갔을 무렵하루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유명하다면서?그러길래- 유명이 무엇인데?하였더니- 몰라!란다. 그래 나는- 그거 안 좋은 거야!하고 말해 주었다. 올해 그 애는 여중 2학년이 되어서교과서에 실린 내 시를 배우게 됐는데자기가 그 작자를 잘 안다고 그랬단다.- 그래서 뭐라고 그랬니?하고 물었더니- 그저 보통 할아버진데, 어찌 보면그 모습이 혼자 노는 소년 같아!라고 했단다. 나는 그 대답이 너무 흐뭇해서- 잘 했어! 고마워!라고 칭찬을 해 주고는그날 종일이 유쾌했다. - 혼자 논다 / 구상  '혼자 노는 소년' - 이웃에 사는 소녀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되고 싶은 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친구 중에 '혼자 노는 소년'에 가..

시읽는기쁨 2024.07.02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울 때는협궤열차를 생각한다해안선을 따라 삐걱이는 안개 속차창을 때리는 찬 눈발을눈발에 묻어오는 갯비린내를 답답할 때는늙은 역장을 생각한다발차신호의 기를 흔드는깊은 주름살얼굴에 고인 고단한 삶을 산다른 일이 때로 고되고떳떳하게 산다는 일이더욱 힘겨울 때 괴로울 때는여인네들을 생각한다아직도 살아서 뛰는광주리 속의 물고기 같은장바닥 여인네들의 새벽 싸움질을 밀려가는 썰물도 잡고 안 놓을그 억센 여인네들의 손아귀를외로울 때는 - 외로울 때 / 신경림  외로움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비슷한 조건인데도 외로움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있고, 덤덤한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고립되면 대체로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 안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없어지거나 축소되어도 마찬가지다. 외로움은 관계의 결핍에서 온다고 봐도 ..

시읽는기쁨 2024.06.23

산수 시간 / 유금옥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확성기를 단트럭이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밖으로살금살금 달아납니다.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드는파아란 밭둑길을 뛰어갑니다.복슬복슬한 흰 구름도 따라갑니다.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목쉰 트럭이기웃기웃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안으로 살금살금강아지를 안고 들어옵니다. 친구들이 3, 1은 3. 3, 2, 63, 3, 9. 구구단을 외우고 있습니다.목소리를 점점 높여 줍니다. - 산수 시간 / 유금옥 어제 관악산에서 초등 동기들 모임이 있었다. 나는 나가지 않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영감들 사진이 단톡방에 무더기로 올라왔다. 내 눈은 스르르 감기면서 타임머신을 탄 듯 60년 전으로 돌아간다. 아마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었을 것이다.  십 년이면 강..

시읽는기쁨 2024.06.16

자작나무숲으로 가서 / 고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오래오래 우리나라는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시읽는기쁨 2024.06.01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 신경림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치는가난한 아내와 부엌도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서 산다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전기도 안 들어와 흐린 촛불 밑에서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도시락을..

시읽는기쁨 2024.05.25

학살1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밤 12시 나는 보았다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이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이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밤 12시 나는 보았다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시읽는기쁨 2024.05.19

용서 / 김창완

엄마나 학교 가다길고양이도 용서하고신호등도 용서하고큰 트럭도 용서했다자전거 타고 가는 누나도 용서하고날아가는 새도 용서했는데그때 구름도 용서했어요"너 용서가 뭔지 아니?"용서가 한번 봐주는 거 아니에요? - 용서 / 김창완  산울림의 멤버로만 알았던 김창완의 이미지가 지금은 동시 작가면서 음유시인으로 달라졌다. 초기부터 예쁜 노랫말을 직접 지었지만, 70대에 접어들어서도 동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동심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인다. 나도 시인의 마음을 닮으면서 늙어가고 싶다. 이 동시를 곱씹어 보면 의미심장하다. 본다는 것은 한자로 '시(視)' '견(見)' '관(觀)' 등이 있고, 영어에도 'see' 'look' 'watch' 등이 ..

시읽는기쁨 2024.05.06

내가 봐도 우습다 / 안정복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翁年垂八十 日與小兒嬉捕蜨爭相逐 점蟬亦共隨磵邊抽石해 林下拾山梨白髮終難掩 時爲人所嗤 - 내가 봐도 우습다(自戱效放翁) / 안정복(安鼎福)  순암 안정복 선생은 18세기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이웃 동네에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가 있다. 앞에는 영장산이 있고 뒤에는 국수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동네다. 선생은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영향을 받았다.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보수적이어서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며 새로운 학문을 추구..

시읽는기쁨 2024.04.27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하늘에서 굽어보면 보리밭이 좋아 보여 종달새가 쏜살같이 내려옵니다. 밭에서 쳐다보면 저 하늘이 좋아 보여 다시 또 쏜살같이 솟구칩니다. 비비배배거리며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다 하루 해가 집니다. - 종달새의 하루 / 윤석중 소년 시절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자면 벌판을 지나야 했다. 가운데에 둑방이 있었는데 왼쪽으로는 하천 언저리의 터가 넓었고, 오른쪽으로는 논과 밭, 과수원이 있었다. 우리는 둑방 위로 날 길을 따라 학교를 오갔다. 봄날이면 벌판에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하늘에서는 종달새가 우짖으며 바삐 날아다녔다. 아지랑이와 종달새 노랫소리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어릴 적 봄 풍경이다. 하지만 종달새를 가까이 볼 수는 없었다. 멀리 작은 점으로 하늘에 떠 있거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모습으로만 ..

시읽는기쁨 2024.04.20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바람의 집 / 이종형 어제가 제주 4.3 사건 76주년이었다. TV로 추념식을 보며 이념 갈등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의 ..

시읽는기쁨 2024.04.04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 박노해

일단 꼬박꼬박 밥 먹고 힘내기 깨끗이 차려 입고 자주 웃기 슬프면 참지 말고 실컷 울기 햇살 좋은 나무 사이로 많이 걷기 고요에 잠겨 묵직한 책을 읽기 좋은 벗들과 좋은 말을 나누기 곧은 걸음으로 다시 새 길을 나서기 - 다시 꿋꿋이 살아가는 법 / 박노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인생살이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골인 지점의 테이프를 제일 먼저 끊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승자는 한 명이고 나머지는 들러리다. 허겁지겁 달리다 보면 넘어지고 깨져서 상처가 아물 틈이 없다. 그 와중에 "세상은 일등만 기억합니다"라는 잔인한 문구를 광고로 쓴 기업도 있었다. '다시 꿋꿋이'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세상의 북소리에 맞춰 달음박질을 계속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질주하는 무리에서 벗어나 ..

시읽는기쁨 2024.03.25

딸년을 안고 /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 딸년을 안고 / 김사인 선거철이라고 온갖 장밋빛 공약이 넘쳐난다. 국회의원 후보는 그렇다치고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발 약속을 하면서 돈을 퍼주겠다고 난..

시읽는기쁨 2024.03.17

가벼히 / 서정주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깐을 짓더라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 가벼히 / 서정주 '가볍게'나 '가벼이'가 아니고'가벼히'다. 시인이 골라 썼을 이 특별한 시어에 자꾸 눈이 간다. '맞날' '인젠' '새이'도 마찬가지다. 이 시가 주는 분위기와 시어의 선택이 절묘하다. 사랑이란 집착이나 소유가 아니다. 그런 사랑은 깨어지기 쉽다. 풀잎사귀 하나 같은 사랑이라면 거센 폭풍우가 닥쳐도 누울 뿐 부러지지는 않는다. 인연의 소중함도 그러하다.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것일 뿐 거기에 천만 금의 무게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인연은 '가벼히 한눈파는..

시읽는기쁨 2024.03.11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한낮에 내리는 눈을 본다. 살포시 내리는 작은 눈송이는 땅에 닿자마자 녹으면서 흔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체에서 액체로 상태만 변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젊었을 때 이 시를 만났다면 '임'은 그리..

시읽는기쁨 2024.03.02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휘트먼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증거와 숫자들이 내 앞에 줄지어 나열되었을 때 더하고, 나누고, 계량할 도표와 도형들이 내 앞에 제시되었을 때 그 천문학자가 강당에서 큰 박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걸 앉아 들었을 때 나는 알 수 없게도,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 홀로 거닐면서 촉촉히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말없이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 내가 그 박식한 천문학자의 말을 들었을 때 / 월트 휘트먼 When I heard the learn'd astronomer; When the proofs, the figures, were ranged in columns before me; When I was shown the charts and the..

시읽는기쁨 2024.02.25

겨울밤 / 박용래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 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 겨울밤 / 박용래 절제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다. 단 네 줄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고향을 떠나온 지 긴 세월이 흘렀고,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자주 찾아오는 나이가 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년의 고향 집 겨울은 따스하다. 시인의 시대로부터 그리 많은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다. 이제 그런 고향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찾아가지 못하는 고향이고, 누군가에게는 찾아가더라도 이미 사라진 고향이 되었다. 기억 속 고향과 현실의 고향은 괴리가 너무 깊다. 그런 불협화음이 우리를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 고향을..

시읽는기쁨 2024.02.17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라다가 초를 거꾸로 꽂었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숭보겄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緩急을 읽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 한용운 만해 한용운의 시집 을 읽었다. 88편의 시가 실린 시집은 '님의 침묵'으로 시작하여 '사랑의 끝판'으로 끝난다. 만해는 1925년에 백담사에 기거하며 이 시들을 썼다. 시집 전체..

시읽는기쁨 2024.02.07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성리학자다. 고려가 망해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혔다. 선생의 나이 40세 때 고려가 망했고, 교분이 두터웠던 이방원이 그를 개경으로 초대하여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뿌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응하기만 했다면 부귀영광은 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이 시조는 이방원의 초청으로 옛 왕도였던 개경을 방문했을 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초야에 묻혀 곧게 살아간 선생의 맑은 기상이 드러나는 한시 '한거(閑居)'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개울가..

시읽는기쁨 2024.01.29

사랑일기 / 하덕규

새벽공기를 가르며 날으는 새들의 날갯죽지 위에 첫차를 타고 일터로 가는 인부들의 힘센 팔뚝 위에 광장을 차고 오르는 비둘기들의 높은 노래 위에 바람속을 달려나가는 저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피곤한 얼굴로 돌아오는 나그네의 저 지친 어깨 위에 시장어귀에 엄마 품에서 잠든 아가의 마른 이마 위에 공원길에서 돌아오시는 내 아버지의 주름진 황혼 위에 아무도 없는 땅에 홀로 서 있는 친구의 굳센 미소 위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수없이 밟고 지나는 길에 자라는 민들레 잎사귀에 가고 오지 않는 아름다움에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겨울 밤차 유리창에도 끝도 없이 흘러만 가는 저 사람들의 고독한 뒷모습에 사랑해요, 라고 쓴다 - 사랑일기 / 하덕규 2016년에 밥 딜런이 노..

시읽는기쁨 2024.01.08

새해 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 새해 인사 / 나태주 2024년 새해가 열렸다. 꿈 없이 꿀잠을 자고 난 첫날 아침이다. 하얀 도화지를 앞에 놓고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설레는 소년이 되어도 본다. 그러다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글자가 환등기의 영상처럼 눈앞에서 명멸한다. '빈 손'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느낌이 정겹고 따스하다. 시인의 새해 ..

시읽는기쁨 2024.01.01

사친(思親) / 사임당

산 첩첩 내 고향은 천리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은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꼬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雙輪月 鏡浦臺前一陳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每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衣膝下縫 - 사친(思親) / 사임당(師任堂) 사임당은 이원수와 혼인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각별했을 것 같다. 원래 다정다감한 성품인지라 어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남달랐으리라. 사임당은 열아홉에 혼인을 한 뒤 7남매를 키우며 파주와 한양에서 살았다. 쪼들리는 살림을 꾸리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동안 ..

시읽는기쁨 2023.12.24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 귀가 따가워도 이 동네 매미가 다 저러는 건 아닐 거야 날개를 비비다 말고 가만히 쉬는 매미가 있을 거야 어쩌면 수줍음 많은 매미도 있을지 몰라 그런 매미 좋다고 찾아오는 암컷도 있을지 몰라 - 다는 아닐 거야 / 방주현 매미의 울음소리는 암컷을 부르는 수컷의 세레나데다. 암컷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큰소리를 내야 유리하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절한 생존경쟁인 셈이다. 땅 속에서 10년 정도 애벌레로 살다가 지상으로 나온 매미는 고작 한두 주 짝짓기를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죽는다. 필사적인 매미의 외침이 이해될 만하다. 한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 중에서 혹 엉뚱한 매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매미일 수도 있고, 내가 왜 소리를 내야 하는지..

시읽는기쁨 2023.12.22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숲을 향하야 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시읽는기쁨 2023.12.12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고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 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 어떤 적막 / 정현종 쓸쓸함이 그대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다. 시든 꽃팔찌를 바라보는 내 탓도 아니다. 쓸쓸함은 존재의 근원에서 퍼져 나가는 둥근 파문이 아닐까. 너와 나의 파문이 만나면 우리 마음은 어떤 형상이나 이미지를 만든다. 그 보이는 형상이나 이미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으로 일가(一家)를 이룬다." 아예 한 몸이 되시는구나. 우주가 수..

시읽는기쁨 2023.11.29

탄로가 / 신계영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만 하아랴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 소년 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 탄로가(嘆老歌) / 신계영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신계영(辛啓榮, 1577~1669) 선생이 쓴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다. 자신의 소년 시절과 비교하며 세월의 무상을 절감하는 노인의 심경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선생은 9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한 셈이다. 노년의 아픔과 쓸쓸함을 몸소 체험한 바가 컸을 것이다. 나도 이제 선생의 마음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시읽는기쁨 2023.11.22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

시읽는기쁨 2023.11.14

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시읽는기쁨 2023.11.06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 안 되고 사랑의 고백 더욱 안 된다면서 긴 세월 살고 나서 사랑 된다 사랑의 고백 무한정 된다는 이즈음에 이르렀다 사막의 밤의 행군처럼 길게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그 이슬 같은 희망이 내 가슴 에이는구나 사랑 된다 많이 사랑하고 자주 고백하는 일 된다 다 된다 - 사랑, 된다 / 김남조 사랑과 믿음을 노래한 김남조 시인이 지난 10일에 세상을 뜨셨다. 향년 96세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시인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를 쓰셨고, 3년 전에는 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다. 올봄에는 시화전까지 열 정도로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동을 했는데 돌연 부음이 들려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인은 종교적 경건함을 바탕으로 인간과 신을 향한 사랑을 찬미한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

시읽는기쁨 2023.10.18

급훈 뒤집기 / 박완호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는 별을 마주치게 되리 - 급훈 뒤집기 / 박완호 불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법연(法演) 선사가 세 제자와 함께 밤길을 가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자 사위가 칠흑으로 변했다.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법연은 제자의 수행력을 알아볼 셈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시읽는기쁨 2023.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