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바람의 집 / 이종형

샌. 2024. 4. 4. 09:34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바람의 집 / 이종형

 

 

어제가 제주 4.3 사건 76주년이었다. TV로 추념식을 보며 이념 갈등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의 비극에 가슴이 쓰렸다. 70여 년이 지났지만 치유되지 않은 유족의 한과 아픔이 오죽하랴 싶다. 시신 발굴과 희생자 확인은 여태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공식 희생자만 1만 4천 명이 넘는다(실제 희생자는 3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나마 2천 년대에 들어서야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대통령이 양민 학살에 대해 사과를 하게 되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정부에 의한 국민의 무차별 학살을 부정할 수는 없다. 4.3은 제주도의 킬링 필드에 다름 아니었다.

 

이번 추념식에는 윤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다.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지지층의 분열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보수 우파에서는 제주 4.3을 남로당을 위시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기획된 반란으로 본다. 그런 시각이라면 민간인 희생도 정당한 진압 행위의 일부가 된다. 아직 제주 4.3은 우리에게 미완의 숙제인 셈이다. 

 

어제 추념식은 슬픈 분위기를 대변하듯 비가 뿌렸다. 또한 조종(弔鐘)의 울음이 제주도의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을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묻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어떤 사람도 홀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각자는 대륙의 한 조각, 대양의 한 부분

흙 한 덩이가 바다에 씻겨 나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해안의 곶이 씻겨 나가는 것처럼 충분히

네 친구의 영토가 그런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이 나를 줄어들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 있기에

그러므로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 마라

누구를 위해서 종이 울리는지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니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존 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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