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토굴가 / 나옹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綠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期限定)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萬古)에 밝았는데 무명장야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제불회상(靈蹴山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거든 소림굴조사..

시읽는기쁨 2022.01.29

용서하세요 / 공재동

태평양 어느 섬에서 찍은 사진에는 비닐장갑과 플라스틱 컵이 마구 쌓여 있었다 파도에 떠밀려 온 죽은 고래 뱃속에서 꺼낸 2037개의 장갑과 3434개의 플라스틱 컵 하나님! 용서하세요 - 용서하세요 / 공재동 한 해에 전 세계의 플라스틱 생산량은 5억 t이 넘는다. 이중 10% 정도가 바다로 버려진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양이다. 태평양 한가운데는 해류를 따라 모여든 플라스틱 조각들이 떠 있는 쓰레기 섬이 있다고 한다. 무려 한반도 면적의 5배라는데 작은 알갱이여서 육안에는 안 보인다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일이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고 죽은 대형 해양생물 소식도 이젠 새롭지 않다. 조개나 물고기도 미세플라스틱에 오염되고 있지만 정확한 실상은 모른다. 먹이사슬을 통해 당장 인간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

시읽는기쁨 2022.01.18

파주에게 / 공광규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임진강변 군대 간 아들 면회하고 오던 길이 생각나는군 논바닥에서 모이를 줍던 철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나를 비웃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가 버리던 그러더니 나를 놀리듯 철책선을 훌쩍 넘어오던 새떼들이 새떼들은 파주에서 일산도 와보고 개성도 가보겠지 거기만 가겠어 전라도 경상도를 거쳐 일본과 지나반도까지 가겠지 거기만 가겠어 황해도 평안도를 거쳐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도 가겠지 그러면서 비웃겠지 놀리겠지 저 한심한 바보들 자기 국토에 수십 년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는 바보들 얼마나 아픈지 자기 허리에 가시 철책을 두르고 있어 보라지 이러면서 새떼들은 세계만방에 소문내겠지 한반도에는 바보 정말 바보들이 모여 산다고 파주, 너를 생각하니까 철책선 주변 들판에 철새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를..

시읽는기쁨 2022.01.12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 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양재에 나가 ..

시읽는기쁨 2022.01.07

겨울바람 / 박근태

달가닥 달가닥 황소바람 춥다고 창문을 두드린다 달가닥 달가닥 방에 들어오려고 틈만 나면 빠끔빠끔 내려다본다 따뜻한 방에 잠시 쉬었다 가라고 커튼 걷고 창문을 열었다 조금 추웠지만 상쾌했다 새해 아침이다 - 겨울바람 / 박근태 새해 첫날이라고 뭐 별 다른 게 있겠는가. 카톡의 수신 표시만 유별나게 자주 눈에 뜨일 뿐이다. 창문을 여니 여느 아침처럼 냉기가 쏴 하고 몰려온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일흔이 되어서 맞는 새해는 덤덤하다. 기대도 없고 다짐도 없다. 이 나이가 되면 세월의 속임수를 어느 정도 눈치채기 때문이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할 텐데 과연 말처럼 쉬울까. 에 나오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움을 푼다[挫銳解粉]'는 구절을 떠올리며 음미해 본다. 나는 좀 더 무뎌질 필요가 있겠다. 그러..

시읽는기쁨 2022.01.01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태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서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 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화이트 크리스마스 / 나태주 몇 년 전부터 크리스마스..

시읽는기쁨 2021.12.25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배추 세 포기 절이려고 소금 항아리 열고 망설이다 전화기를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자 신호 한 번 가지 않고 들리는 말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낯선 목소리에 가슴이 덜컹 힘이 빠진다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올라온다 큰언니의 번호를 눌러본다 소금 몇 공기 퍼야 하는지 모른다고 울먹이자 이 바보야, 네 나이가 몇인데 말끝을 흐린다 내 요리책이었던 엄마 음식 만들다 말고 전화기만 들면 몇십 년 한결같이 초판 내용을 유지했었다 몇 번을 물어도 반갑게 말해주던 엄마 음성 그리워 배추를 절이다 말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는다 눈물로 푹 절여진 얼굴 간이 밴 표정이 엄마를 닮았다 - 사라진 요리책 / 신수옥 "감사할 일 투성이네." 얼마 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들은 말이다. 아흔 노모가 시골에서 건강하게..

시읽는기쁨 2021.12.20

소원수리 / 권순진

내 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오밤중 담 너머로 쌀 가마니 세 개를 넘기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부터다 불의에 수발을 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다 그 일을 보조하기 위해 방위 둘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후방 헌병대였고 쌀은 남아돌았다 수감자들에겐 정량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헌병들은 외식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음날 워커발로 조인트를 여러 차례 까였다 동료 사병들도 내가 포크 창에 찍힌 노란 단무지 같은 신세인 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비겁 위에 물구나무 선 연민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찍힌 건 나 말고도 더 있다 소원수리 때 '황소무사통과탕'에 대한 진실을 까발렸다가 필적감정으로 들통 난 K상병이다 나도 종이 앞에서 딸막딸막한 적은 있으나 다른 병사처럼 '현재 생활 만..

시읽는기쁨 2021.12.14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사람을 쬐다 / 유홍준 밤골에서 살 때 비어 있던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찾지도 않았다. 어떤 사연으로 산골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

시읽는기쁨 2021.12.05

사진첩 / 쉼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프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

시읽는기쁨 2021.12.01

밤이 얼마나 되었나 / 김시습

밤이 얼마나 되었나,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숱한 별 찬란하여 빛발을 쏟누나 깊은 산 깊고 깊어 가물가물 어두운데 아아 그대는 어찌 이런 산골에 머무는가 앞에는 범과 표범 뒤에는 승냥이와 이리 게다가 올빼미 날아와 곁에 앉는 곳 인생살이란 뜻 맞음이 귀한 법 그대는 어이해서 홀로 허둥대는가 나 그대 위하여 오래된 거문고를 타려 하나 거문고 소리 산만하여 슬픔이 밀려오고 나 그대 위하여 긴 칼로 검무를 추려 하나 칼 노래 강개하여 애간장을 끊으리 아아 슬프다 선생이여, 무엇으로 위로하랴 삼동 이 긴긴 밤을 어이 한단 말인가 夜如何其夜未央 繁星燦爛生光芒 深山幽邃杳冥冥 嗟君何以留此鄕 前有虎豹後豺狼 況乃鵬鳥飛止傍 人生百歲貴適意 君胡爲乎獨遑遑 我欲爲君彈古琴 古琴疏越多悲傷 我欲爲君舞長劍 劍歌慷慨令斷腸 嗟嗟先生何以慰 ..

시읽는기쁨 2021.11.23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

시읽는기쁨 2021.11.15

낙엽 /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 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 낙엽 / 복효근 '투신'은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말이다. '낙하'가 아니라 '투신'이라고 한 데에 이 시가 살아 있다. '투신'은 죽음을 회피하거나 죽음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맞이하는 태도다. 그래서 아름답고 찬란하다. 가을이 짙어진다. 어디에나 낙엽이 가까이 있다. 발에 밟혀 바삭거리는 낙엽은 재잘대는 아이들처럼 명랑하다. 낙엽한테는 거부의 몸짓을 찾을 수 없다. 생의 막바지에서 왜 노을빛처럼 아름다운지를 생각한다. 올 가을에 낙엽을 보며 내가 떠올려야..

시읽는기쁨 2021.10.30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착하다 사람 좋다 그기 다 욕인기라 사람 알로 보고 하는 말인 기라 겉으로는 사람 좋다 착하다 하믄서 속으로는 저 축구(芻狗) 저 등신 그러는 거다 우리 강생이 등신이 뭔 줄 아나 제사 때 쓰고 버리는 짚강생이가 바로 등신인 기라 사람 축에도 못 끼고 귀신 축에도 못 끼는 니 할배가 그런 등신이었니라 천하제일로 착한 등신이었니라 세상에 두억시니가 천지삐까린데 지 혼자 착하믄 뭐하노 니는 그리 물러 터지면 안 되니라 사람 구실을 하려믄 자고로 모질고 독해야 하니라 길게 말할 게 뭐 있노 우리 강생이 그저 할배랑 반대로만 살면 되니라 하모 그라믄 되니라! - 혼자만 착하믄 뭐하노 / 박제영 착한 남편과 사느라 할매는 무지 고생을 했는가 보다. 손주를 앞에 두고 착하게만 살면 안 된다고 간절하게 당부한다. 정..

시읽는기쁨 2021.10.24

뽑기 해 먹기 / 김창완

준비물 설탕 소다 국자 불 뚜껑을 열면 연탄 냄새 콧구멍 수세미질을 한다 코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다 날름거리는 불꽃 위에 설탕 담은 국자를 갖다 대면 꿀이 된다 젓가락으로 소다를 찍어 녹은 설탕물을 저으면 부풀어 오르면서 뽑기가 된다 황홀하게 달콤하고 위험하게 고소하다 국자 색깔은 새카맣다 이제 얻어맞는 일만 남았다 - 뽑기 해 먹기 / 김창완 '오징어 게임' 때문에 다시 뽑기가 유행하는가 보다. 그것도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부는 열풍이다. 드라마에서는 '달고나'라고 하는데, 이걸 만드는 달고나 만들기 세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종류가 엄청 많다. 대략 1만 원 정도 하는데 워낙 인기가 있어서 처음보다 두 배나 값이 올랐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자취방이 바..

시읽는기쁨 2021.10.14

겨울 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겨울 산 / 황지우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우리가 월세로 내야 하는 게 고통이란다. 고통의 해석이 신선하다. 살면서 응당 지불해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고통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을 수도 있다. 시인은 겨울 산에 올라서 사람만 아니라 산 역시 견디며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물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연유로 집에서 나왔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걸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라는 단..

시읽는기쁨 2021.10.04

내가 몰랐던 일 / 이동순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녁밥을 기다리던 수백 개의 거미줄이 나도 모르게 부서졌고 때마침 오솔길을 횡단해가던 작은 개미와 메뚜기 투구벌레의 어린 것들은 내 구둣발 밑에서 죽어갔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 새끼 두더지로 하여금 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고 사람이 낸 길을 초록으로 다시 쓸어 덮으려는 저 잔가지들의 애타는 손짓을 일없이 꺾어서 무자비하게 부러뜨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풀잎 대궁에 매달려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영롱한 이슬방울의 고고함을 발로 차서 덧없이 떨어뜨리고 산길 한복판에 온몸을 낮게 엎드려 고단한 날개를 말리우던 잠자리의 사색을 깨워서 먼 공중으로 쫓아버렸다 내가 기운차게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이처럼 나도 ..

시읽는기쁨 2021.09.25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 이희중

1 젊은 날 녹음해서 듣고 다니던 카세트 테이프 를 꺼내 듣다가, 까맣게 잊었던 노래 그 노래를 좋아했던 시간까지 되찾고는 한다. 그러니 새 노래를 더 알아 무엇 하나, 이미 나는 너무 많은 노래를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내 한 시절과 단단히 묶여 있는데 지금 들으면 간주마다 되새길 서사가 있어 귀에 더 두툼하고 묵직하니 이제, 모아둔 음반, 가려 녹음해둔 테이프 를 새겨듣기에도 내 세월이 넉넉하지 않음을 안다. 2 옷장을 열어보면, 기워 입지 않고 버리는 부유한 세상으로 건너오며 한 시절 내가 골라 입었던 적지 않은 옷들, 오늘 내 생애처럼 걸려 있거나 쌓여 있다. 다 아직 입을 수 있는 옷들, 반팔, 반바지는 헌 자리 하나 없다. 그러니 새 옷을 더 사 입어 무엇 하나, 문득 열 해, 스무 해 전 옷을..

시읽는기쁨 2021.09.19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외딴 곳에서 하루하루 보내다가 이 번잡한 광화문사거리 다시 와 서보니 주름진 얼굴 된 나만 산 것 같다 우리 기다려주던 사람이나 나무들 풍경 하나씩 바꾸며 없어져 갔고 옛것들 다 비켜서라!며 새것들 차례로 와서 치장할 거고 그들끼리는 쉽게 친해지겠지 그렇지, 그들끼리는 그들 세상을 공들여 만들어가겠지 다음 또 다음 우리가 보낸 세월까지도 지우면서 - 너 여기서 무엇 하고 있느냐 누구 내 어깨라도 툭 쳐줬으면 싶다 - 아는 얼굴들 다 어디로 / 이유경 이유경 시인의 시집 을 샀다. 흘러간 세월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쓸쓸하다. 늙는다는 건 익숙한 것에도 자꾸 낯설어지는 것 같다. 사람도 장소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몇 차례씩 만나는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 ..

시읽는기쁨 2021.09.07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분별하고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일일 뿐, 잘난 도토리 못난 도토리가 어디 있겠는가. 땅에 떨어져서 청설모의 먹이가 되든, 어찌해서 참나무로 자라든, 도토리는 각자의 몫을 한 것뿐 거기에 우열은 없다. 들에 핀 꽃이나..

시읽는기쁨 2021.08.30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가끔 나는 나무 한 그루의 잎들을 세느라 종일을 보내지. 그러기 위해선 가지마다 기어올라 공책에 숫자를 적어야 해. 그러니 내 친구들 관점에서는 이런 말을 할 만도 해. 어리석기도 하지! 또 구름에 머리를 처박고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물론 언젠가는 포기를 하게 되지만 그때쯤이면 경이감에 반쯤은 미쳐버리지 - 무수한 잎들, 고요한 나뭇가지들, 나의 가망 없는 노력. 그 달콤하고 중요한 곳에서 나, 세상-찬양 충만한 큰 웃음 터뜨리지. - 어리석다고? 아니, 그렇지 않아 / 메리 올리버 Sometimes I spent all day trying to count the leaves on a single tree. To do this I have to climb branch by branch and wr..

시읽는기쁨 2021.08.22

홍어 / 정일근

먹고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맛 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 안주를 나눠 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 게 홍어라고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번 취하고 싶다 - 홍어 / 정일근 삭힌 홍어 맛을 본 것..

시읽는기쁨 2021.08.17

그 샘 / 함민복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그 샘 / 함민복 우리는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불문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혜의 정신 대신 탐욕과 시기만 남았다. '영끌'은..

시읽는기쁨 2021.08.08

새 / 정유경

새는 길을 외어 두지 않아요 새는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하늘을 날고 그래서 새가 가는 길은 늘 새 길 - 새 / 정유경 새는 늘 '새' 길을 날아서 이름이 '새'인가 보다. 반면에 더위가 계속된다고 짜증 내고, 매일이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라고 불평하는 나는 '헌'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게다. 기억의 찌꺼기를 걷어내면 오늘은 얼마나 찬란한 하루인가. 마침 창 밖으로 물까치 한 마리가 짧은 선을 긋고 지나간다. 저 상쾌한 가벼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 흔적을 바라본다.

시읽는기쁨 2021.07.29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가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는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한..

시읽는기쁨 2021.07.24

어떤 도둑질 / 윤정옥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 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 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 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

시읽는기쁨 2021.07.17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요즈음 정치에 입문한 어떤 분이 '십 원 한 장' 남에게 피해를 끼..

시읽는기쁨 2021.07.10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입에 녹는 안심살, 감칠맛 돌가자미, 세상의 별난 음식 먹어봐도 몇 번이면 물리고 말지. 고구마밭 지심맬 제 이랑 고랑 지천으로 자라 뽑아도 뽑아도 질긴 생명력으로 힘들게 하던 쇠비름, 다른 놈들은 뽑아서 흙만 털어놓으면 햇볕에 말라 거름이 되는데 이놈은 말라죽기는커녕 몇 주 후라도 비가 오면 어느새 뿌리를 박고 살아나지. 하는 수 없이 밭고랑 벗어난 길에 던져놓아 보지만 오가는 발길에 수없이 밟혀 형체도 분간 못할 지경이 되고서도 비만 오면 징그럽게 살아나는, 시난고난 앓고 난 뒤, 먹고 싶었다. 푹 삶은 쇠비름, 된장 고추장 고소한 참기름으로 비빈 - 쇠비름 비빔밥 / 조성순 쇠비름을 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중학생 시절 읍에서 외할머니와 둘이 살 때, 여름 별미는 된장으로 무친 쇠비름이었다. 보..

시읽는기쁨 2021.06.29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습니다 나는 천의 바람, 천의 숨결로 흩날립니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며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입니다 당신이 아침 소리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고요히 맴돌고 있습니다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따스한 별입니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세요 나는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미상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 on snow. I am the sunlight on ripe..

시읽는기쁨 2021.06.20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시읽는기쁨 2021.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