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떤 도둑질 / 윤정옥

샌. 2021. 7. 17. 10:50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금껏 나는 칠순 노모의 김치를 먹고 있다

음식 비법을 전수하기 싫은 이름 난 식당 주인처럼

도대체 내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고 해치워버린다

김장해놨으니 가져가거라

돌멩이 맞을 소리지만

왜 그랬냐고 날 부르지 그랬냐고 하면서도

한 시간 후에는 소요산쯤을 지나고 있다

차로 한 시간 반 거리

철대문을 요란스럽게 열고 들어가

고구마, 마늘, 김치, 만두, 가래떡을 한 아름 들고 나온다

도둑질을 당당하게 하고 나온다

아마 나는 엄마의 인생에서

알토란 같은 시간을 도둑질했을 것이다

단번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서너 번의 분절로

허리 펴 선 자리, 발끝마저 점점 흐릿해지는

엄마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껏 바윗덩이를 지고 무심한 산을 올랐듯

오르는 것밖에는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갈퀴 같은 손 펴볼 틈 없이

여전히 있음을 만들고 있다

발아된 생명 키우고 있다

 

- 어떤 도둑질 / 윤정옥

 

 

지난번 고향에 내려갔을 때 구순 노모가 싸주시는 먹을거리를 실으니 차 트렁크가 가득 찼다. 한때는 안 가져간다고 생떼도 써봤지만 그게 도리어 불효인 것 같아 다 포기하고 넙죽넙죽 받아 넣는다. 젊어서부터 칠순에 이른 지금까지 평생을 해 온 도둑질이다. 너무 뻔뻔스러워 "잘 먹을게요"라는 말도 이젠 입 안에서만 맴돌 뿐이다. 당신 허리는 90도로 굽고 무릎이 아파 병원에서 주사를 맞아야 진정되면서, 어머니의 일편단심은 자식 마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한다.

 

오늘 첫째가 손주를 데리고 온다고 아내는 며칠 전부터 부산하다. 하루에도 서너 개의 택배 상자가 도착한다. 먹어야 하고 반찬을 만들어 보내야 한다. 아침에는 일찍 텃밭에 나가 채소를 두 손 가득 담아왔다. 오늘에 맞춰 잘 익도록 기다린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자식인데 뭘 그리 신경써야 하는지 나는 신기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면서 바라본다. 아무리 말려도 안 되는 건 아내나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어머니의 힘'일까, 아니면 '어머니의 멍에'일까. '사랑'이나 '희생'이 경우에 따라서는 무서운 덕목으로 변한다. 자식을 도둑으로 몰지 않도록 이기적인 어머니가 될 수는 없는지, 나는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