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샌. 2022. 1. 7. 11:21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 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 감정손해보험 / 이종섶

 

 

양재에 나가 친구들을 만났다. 여섯 명이 공 굴리기를 하고 놀다가 식당에 갔다가 네 명이 넘는다고 쫓겨났다. 셋씩 나누어 다른 테이블에 앉겠다고 해도 규정대로 해야 한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어쩔 수 없이 셋은 다른 식당으로 가야 했다. 그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는데 식사 중에 종업원이 또 백신 접종 확인을 하러 왔다. 한 친구는 백신 부작용에 대한 염려로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부리나케 자리를 파할 수밖에 없었다. 씁쓰레했지만 이만큼 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는 식당이 있다는 게 고맙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친구 만나는 횟수가 확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가서 얼굴을 보여야 하는 모임이 있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감정보험을 드는 것이다. 만나지는 못해도 월회비나 연회비는 꼬박꼬박 낸다. 감정보험료인 셈이다. 늙어서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두렵다. 그래서 얼마나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을 견디기가 쉬워졌을까. 저녁 9시가 되니 옛 시절 통금 사이렌이 울리듯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의 겨울바람은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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