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홍어 / 정일근

샌. 2021. 8. 17. 10:12

먹고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맛 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 안주를 나눠 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 게 홍어라고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번 취하고 싶다

 

- 홍어 / 정일근

 

 

삭힌 홍어 맛을 본 것은 30대가 되어서였다. 당시 직장 근처인 장안동에 홍어를 잘 하는 집이 있었다. 여기에 선배를 따라갔다가 한 순간에 홍어 맛에 빠졌다. 처음 먹어보면서도 쏘는 맛이 제일 강한 것을 주문할 정도로 홍어는 새로운 맛의 세계였다. 김치와 돼지 수육을 합쳐 삼합이라고 부르는가 본데, 나는 다른 고기를 보태는 것보다 맨 홍어가 훨씬 좋았다. 홍어에 묵은 김치를 싸서 먹을 때의 탁 쏘는 무지막지한 맛, 거기에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면 세상의 시름이 싹 달아났다.

 

그 뒤로 가끔 홍어 맛을 보지만 대개 심심했다. 그마저도 요즈음은 홍어 하는 집을 만나기가 어렵다. 흑산도 홍어는 거의 사라지고 대부분이 수입 홍어라고 한다. 국산이냐 수입이냐를 가릴 처지가 아니고, 그 옛날 장안동에서처럼 입안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자극을 즐기고 싶다.

 

코로나 감염자 수가 하루에 2천 명대까지 올라가며 바깥 활동에 제동을 걸고 있다. 장기간 인간관계가 끊기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 코로나 블루(Corona Blue)다. 방콕 취향인 나마저도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이번 주 금요일의 친구 모임에는 불문곡직하고 나가서 헛소리라도 떠들다 와야겠다. 혹 홍어집을 만난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콧구멍과 더불어 답답한 마음까지 뻥 뚫어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