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 샘 / 함민복

샌. 2021. 8. 8. 11:54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짠 일도 아닌데 새벽 제일 맑게 고인 물은 네 집이 돌아가며 길어 먹었지요. 순번이 된 집에서 물 길어 간 후에야 똬리 끈 입에 물고 삽짝 들어서는 어머니나 물지게 진 아버지 모습을 볼 수 있었지요.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순번이 자연스럽게 양보되기도 했었구요. 넉넉하지 못한 물로 사람들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던 그 샘가 미나리꽝에서는 미나리가 푸르고 앙금 내리는 감자는 잘도 썩어 구린내 훅 풍겼지요.

 

- 그 샘 / 함민복

 

 

우리는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살벌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불문율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혜의 정신 대신 탐욕과 시기만 남았다. '영끌'은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이란다. 섬찟한 말이다. 막무가내로 절벽으로 치닫는 레밍 떼와 인간이 다른 게 무엇인가.

 

네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을 것이다. 마실 물마저 부족했지만 사람들 마음은 넉넉했다 한다. 불과 한 세대 전 이야기다.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적어도 아귀다툼은 하지 않았다. 돈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내팽개치지는 않았다. 물질의 풍요가 도리어 마음의 가난을 초래하는 역설에 우리는 시달린다. 갈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영혼을 달래줄 시원한 '그 샘'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