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청량리역 / 서경온

중1 담임교사였을 때 가출한 학생을 청량리역에서 찾았다 자그마한 어깨에 아버지의 긴 낚싯대를 메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바다 가서 고기를 잡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버스 안내양의 다급한 외침이 "차라리 죽는 게 나요"라고 들린다던 60년대 어느 날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희미한 제천역 대합실 불빛을 떠나 비 내리는 밤 청량리역에 내렸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스카극장의 휘황한 네온사인이 처음 보는 바닷속 찬란한 물고기들 같았다 - 청량리역 / 서경온 나 역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시절 서울로 오는 유일한 방법은 중앙선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완행과 급행이 있었는데 감히 급행을 탈 엄두는 못 내고 역마다 모두 서는 완행만 탈 줄 알았다. 자리가 안 나면 ..

시읽는기쁨 2022.10.09

혼자라서 / 이운진

썩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구름의 지도를 그리고 꽃이 피는 속도를 알았으니까 정확히 몇 시에 대추나무가 가장 곧게 서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없는지, 내 꿈은 왜 자꾸 무너지는지 생각하다가 뒤늦은 질투에 부끄러워지는 일 봄볕 같은 감정들을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어 - 혼자라서 / 이운진 인생이란 '혼자'와 '함께'의 균형/조화를 맞추는 일이 아닐까. 오청원 9단이 '바둑은 조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인생에도 마찬가지이지 싶다(마침 어제 우리나라의 오유진 9단이 오청원배 세계 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왕청신을 꺾고 우승을 했다). 조화가 양적인 중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와 '함께'의 비율을 5:5로 지킨다고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각자 타고난 성향..

시읽는기쁨 2022.09.29

아기 업기 / 이후분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아기 업기 / 이후분 우리가 어렸을 적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상례였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꼴을 베거나, 뒷산에서 땔감을 하거나, 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하는 일은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송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제일 인기 있었다. 송아지는 제가 알아서 풀을 뜯고, 그동안에 우리는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한참 뒤에야 송아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저녁 느지막..

시읽는기쁨 2022.09.19

추석 만월 /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느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흘리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추석 만월 / 송진권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다. 심..

시읽는기쁨 2022.09.12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이 올해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이발소'를 개업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웬 이발소? "라고 의아해했는데 '이야기발명연구소'의 줄임말이란다. 그리고 명..

시읽는기쁨 2022.09.08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그냥 둔다 /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한다고 비워지고 내려놓게 되지야 않지만 일상이 비틀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늘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근심덩이다. 잔뜩 움켜쥐고는 힘들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의미 있음이나 없음으로 가치를 나눌 수 없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할 뿐 내 분별심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주관과 아집에 의해서 '있는 그..

시읽는기쁨 2022.08.16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 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

시읽는기쁨 2022.08.03

읽었구나! / 양애경

혜린이니 다혜니 하루에도 서너 건씩 비아그라 성인 음란광고가 이메일에 쌓여서 스팸신고 하다 하다 못해 5년 만에 답장을 했다 "저는 육십이 다 된 여자예요. 정력제 광고는 그만해주세요." 그 뒤, 이메일 제목이 달라졌다 비아그라 / 여성흥분약품 프리미엄 성인쇼핑몰 해외직수입 정품 아직 '여성흥분약품'이 남았구나, 그렇다면 "육십이 넘었다니까요." 이렇게 다시 답장을 해야 하나, 하다가 그나저나 신통방통하다 내 답장을 읽었구나! 누굴까 그 사람. - 읽었구나! / 양애경 나는 아예 모르는 이름의 발신 메일은 읽지를 않고 삭제한다. 열어봐야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긴요한 메일까지 삭제해서 낭패를 겪기도 한다.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블로그에도 댓글이 달린다. 반가워서 열어보면 반 정도는 비아그라 같은 정..

시읽는기쁨 2022.07.24

길 / 김시천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평생을 동무하여 함께 걸어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제 마음 다 퍼내어 서로의 먼지 낀 자리 병든 상처 씻어주고 마른 목 적셔주며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늘 비로소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먼길 앞에 두고 비록, 지금 가난하다 하여도 그러나 그것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히려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만으로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지금 시작한다는 것은 - 길 / 김시천 오솔길, 언덕길, 숲길, 고갯길, 논두렁길, 밭두렁길, 꼬부랑길, 비탈길, 가시밭길, 벼룻길, 외퉁길, 후밋길, 한길, 지름길, 에움길, 거님길, 두멧길, 뒤안길, 발구길, 푸서릿길, 눈석잇길, 돌서덜길, 자..

시읽는기쁨 2022.07.19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와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시읽는기쁨 2022.07.10

여름밤 / 김용화

견우직녀 만난다는 칠석날 밤 감나무 아래 모깃불 올리고 떠꺼머리 총각들 모여 앉아 말미 받아 돌아온 머슴살이 성배 형 연애담을 듣노라면 별자리 돌아 밤은 깊어 산골짝 옹달샘 마을 처녀들 목욕하며 쫑알대는 소리 꺼벙이 노총각을 앞세워 조심조심 오리걸음으로 다가갈 때 자발없는 어느 놈, 킬킬대 판을 깨면 앙칼진 처녀들 목청은 밤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어 반짝이고 - 여름밤 / 김용화 마당에 멍석을 펴고 온 식구가 저녁 밥상을 마주한다. 매캐하면서 구수하기도 한 모깃불 연기가 바람 따라 식구들을 순서대로 만나고 지나간다. 엄마는 큰 양푼이에 보리밥과 푸성귀를 섞은 비빔밥을 만든다. 상 가운데는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다. 풀벌레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노랫소리로 요란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어디론가 흩..

시읽는기쁨 2022.07.03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 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사실 꽃 피어도 그다지 보는 사람은 없는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구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 상점에서 쌀 한 봉지 비름나물 한 묶음 ..

시읽는기쁨 2022.06.26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멀리 있는 신기루에 홀려 발 밑의 꽃밭은 보지 못한 채 허덕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내 삶이 꽃이고, 감탄사인 것은 아닐까. 나는 장님이어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무 많이 소유하고 지식이 넘쳐서 모든 것이 시시해진지도.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에 서면 세상살이의 온갖 근심조차 꽃으로 알게 될까. 기쁨과 환희와 함께 근심과 시련의 꽃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아름다운 인생의 꽃밭을 보게 될까.

시읽는기쁨 2022.06.16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그것도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바람 속에는 연꽃 향기 시들고 섭섭한 마음도 색이 바랜 뒤일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바람은 돌고 돌아 다시 연꽃밭을 지나갈지 모른다. 전생에서 수없는 만남이 있었음을 바람은 눈치채지 못하리라. 향기를 머금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바람은 조금은 섭섭해..

시읽는기쁨 2022.05.23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커다란 박에 구멍을 뚫고 안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는다. 손을 박 안으로 집어넣은 욕심 많은 원숭이는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펴지 않으니 박에서 손을 빼낼 수..

시읽는기쁨 2022.05.11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멋진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에 그리움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일 게다. 그리움은 그가 내 옆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결핍의 감정이다. 어쩌면 소유욕의 일종인지 모른다. 사전에서는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움 중에는 짝사랑 같은 일방통행식 그리움도 있고,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시읽는기쁨 2022.05.01

어서 빛으로 일어나 / 이해인

주님 일어나십시오 돌무덤에 갇혀 있던 어둠을 밀어내고 어서 빛으로 일어나 우리에게 오십시오 죽음의 깊은 잠을 떨치고 일어나신 당신의 기침소리에 온 우주는 춤추기 시작하고 우리는 비로소 나태의 깊은 잠에서 깨어납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온 인류를 일으켜 세우신 그리스도여 죄를 뉘우쳐 눈이 맑아진 기쁨으로 오늘은 부활하신 당신의 흰 옷자락을 붙들고 산을 넘고 싶습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끝내는 아름답게 피워 올린 자목련 빛 사랑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추어 둔 향기를 아낌없이 쏟아내는 4월의 꽃나무들처럼 기쁨을 쏟아내며 우리는 모두 부활하신 당신을 닮고 싶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생명의 수액을 뿜어올리는 생명나무이고 싶습니다 어서 빛으로 일어나 우리에게 오십시오 - 어서 빛으로 일어나 / 이해인 그저께 ..

시읽는기쁨 2022.04.19

외출 / 허향숙

먼지처럼 쌓이는 말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시부모 때문에, 남편 때문에 불쑥불쑥, 시루 속 콩나물처럼 올라오는 말들을 거미줄 치듯 집 안 곳곳에 걸어두곤 하였다 하고 싶은 말 혀 안쪽으로 밀어 넣고 이빨과 이빨 사이 틈을 야물게 단도리하곤 하였다 이말산 근처 산자락 근방 카페 창가에 앉아 나만을 위하여 브런치 세트를 주문한다 해종일 하늘을 보다가 빽빽이 들어찬 허공의 고요를 보다가 인체 혈관 3D 사진 같은 한 그루 나무를 보다가 우듬지로 올라간 빈 둥지를 보다가 빈 둥지 같다는 생각을 들여다보다가 카페에 여자를 벗어놓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어머니로 갈아입는다 - 외출 / 허향숙 요사이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 소설과 이 시의 분위기가 닮은 데가 많다. 인생에서 상심(傷心)은 늘 함께 하는 것이 ..

시읽는기쁨 2022.04.10

버릇 / 박성우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 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버릇 / 박성우 위층에 사는 올빼미 덕분에 깜짝 놀라며 잠이 깼다. 자정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되면 잠잠해지는 2시까지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라디오를 틀었더니 진행자가 이 시를 소개해 주었다. 그래, 이런 재미있는 시를 만났으니 오늘밤은 올빼미도 용서해주마. 궁금한 건 첼로 아가씨..

시읽는기쁨 2022.03.31

임사선(臨死船) / 다니카와 슌타로

모르는 사이에 저승행 연락선을 타고 있었다 제법 붐비고 있다 늙은이가 많지만 젊은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아기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혼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서로 붙어 있는 남녀도 있다 저승에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대로 이 배 위에서 흔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면 너무 편하다 하고 생각했으나 왠지 허전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른다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는지 문득 위를 올려다봤더니 여기에도 하늘이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초가을의 늦은 오후의 빛이다 바랜 청색을 아련한 주황색이 베일처럼 덮어 있다 깰 것 같으면서도 깨지 않는 꿈 같다 배는 낮고 고풍스러운 기관음을 내고 달린다 저승이 아직 멀었나 옆에서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시읽는기쁨 2022.03.24

행복 / 심재휘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지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3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스무 살 뒷모습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지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행복 / 심재휘 강릉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지인이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내온다. 강릉에는 바다 전망이 좋은 카페가 참 많은 것 같다. 지인은 인생이란 모름지기 재미있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약간은 질투가 나서일까, 나는 이 시를 차용하여 속으로 중얼거린다. "매일이 보람 있고 행복하다면 그 역시 힘겹지 않겠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날도 있어..

시읽는기쁨 2022.03.15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 이문재 자유와 고독, 어떻게 보면 서로 대척점에 선 말 같다. 그렇다면 둘을 잘 조화시키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아도 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고독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가 아니..

시읽는기쁨 2022.03.05

가장의 밤 / 김용화

잠든 아내 이불 끌어다 미운 발 덮어주는 일 딸 자는 방 살짝 들어가 지폐 한 장 찔러주는 일 아들놈 우산 갖다주고 책가방 들어주는 일 창밖 밤비 소리 들으며 쓴술 삼키는 일 - 가장의 밤 / 김용화 가장으로서의 남자에게는 두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내 울타리를 소중히 지키려는 마음과, 경계에 갇힌 답답함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시를 쓴 시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의 세 연과 끝 연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로 나에게는 읽혔다. 나는 늘 뒤쪽이 승했다. 반면에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으로 넘쳐나는 것 같다. 엊저녁에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아나운서가 소개해 주어서 이 시를 알게 되었다. 나는 아내 이불 덮어주는 일도, 딸 지갑에 지폐 찔러주는 일도, 아들놈 우산 갖다주는..

시읽는기쁨 2022.02.26

우수 / 나종영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 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 부스럭 누군가 밑 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 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우수(雨水) / 나종영 봄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문자대로라면 입춘(立春)이 봄의 시작일 텐데 우리나라에서 2월 초순은 봄이라기에..

시읽는기쁨 2022.02.20

온유에 대하여 / 마종기

온유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그 사람 빈집 안의 작은 불꽃이 오늘은 더욱 맑고 섬세하구나 겨울 아침에 무거운 사람들 모여서 온유의 강을 조용히 건너가느니 주위의 추운 나무들 눈보라 털어내고 눈부신 강의 숨결을 받아 마신다. 말과 숨결로 나를 방문한 온유여, 언 손을 여기 얹고 이마 내리노니 시끄러운 사람들의 도시를 지나 님이여 친구가 어깨 떨며 운다. 그 겸손하고 작은 물 내게 묻어와 떠돌던 날의 더운 몸을 씻어준다. 하루를 마감하는 내 저녁 속의 노을, 가없는 온유의 강이 큰 힘이라니! 나도 저런 색으로 강해지고 싶었다. 불타는 뜬구름도 하나 외롭지 않구나. - 온유溫柔에 대하여 / 마종기 '따뜻할 온(溫)'과 '부드러울 유(柔)', 온유(溫柔)는 참 아름다운 말이다. 사전에는 '성격이나 태도 따위가 온화..

시읽는기쁨 2022.02.15

절간의 소 이야기 / 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人間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산首陽山의 어뉘 오래된 절에서 칠십七十이 넘은 로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 - 절간의 소 이야기 / 백석 어릴 적에 집에서 기르던 개가 아플 때 개집에서 꼼짝 않고 엎드려 금식을 하며 버티는 걸 보았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뛰어왔는데 내가 다가가도 눈만 끔뻑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죽은 듯이 지내다가 어느 날 거동을 시작하고 보란 듯이 회복되었다. 사람은 아프면 온갖 요란을 떠는 데 개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었다. 어린 눈에도 무척 신기했다. 절간의 소 이야기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짐승은 인간보다 영(靈)한 면이 있다. 어..

시읽는기쁨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