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8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인간..

시읽는기쁨 2022.12.31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내 사랑 그대를 사랑하기 위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대 사랑 날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닙니다 우린 그저 하늘 아래 강아지풀처럼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에 풀씨 부딪듯 나 그대 눈빛 그렇게 만났습니다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있는 것 아닙니다 천지가 강아지풀 어질게 키우지 않듯 내 마음속 그대 사랑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리고 흔들릴 뿐입니다 - 강아지풀처럼 그저 흔들릴 뿐 / 유하 생물학적으로 볼 때 그저 짝을 찾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사랑만큼 강렬한 감정도 없다. 특정 시기가 되면 사랑의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이성이 마비되고 눈에는 콩깍지가 씌어진다. 운명이라고 부르는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세상사는 슬프고 허무하다. 운명은 왜 그리 쉽게 우리를 버리고 떠나가는지, 어느..

시읽는기쁨 2022.12.23

별빛 내시경 / 이원규

눈을 감아야 보이는 것들 도시를 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반딧불이 은하수 가물가물 첫사랑의 눈빛 두 눈이 멀기 전에 캄캄한 곳으로 가자 예감의 더듬이 더 바스라지기 전에 오지 마을로 별빛 사냥을 가자 네온사인 가로등 텔레비전 핸드폰 별 볼일 없는 세계 최악의 빛 공해 나라 밝아도 너무 밝아 생각은 먹통이고 사랑과 혁명도 시청률이 다 정해져 있더라 한반도 밤의 위성사진이 캄캄한 곳 진안 봉화 영양 인제 개마고원 백두산 북간도의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가보자 고흐의 별이 빛나는 아를 카페거리 생레미 생폴 정신병원도 너무 밝아졌더라 나는 왜 무엇으로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동해선 종단열차를 타고 고성 원산 청진 북두칠성 삼태성에게 물어나 보자 울다가 휙 노려보던 당신의 눈초리 별빛을 사냥하다 슬그머니..

시읽는기쁨 2022.12.18

나무에 있는 노인 / 에드워드 리어

나무에 나이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벌 때문에 엄청 귀찮아했죠. 사람들이 묻기를 "벌이 붕붕거려요?" 그는 대답하기를 "물론 그렇죠! 그게 바로 벌의 진짜 성질인걸요." - 나무에 있는 노인 / 에드워드 리어 There was an Old Man in a tree Who was horribly bored by a bee: When they said "Does it buzz?" He replied, "Yes, it does! It's a regular brute of a bee." - There was an Old Man in a tree / Edward Lear 우리는 수많은 타자와 접촉하면서 살아간다. 우주에 존재하는 대상은 서로 관계하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인생살이의 괴로움도 대부분..

시읽는기쁨 2022.12.09

어머니 / 이시영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 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 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시읽는기쁨 2022.12.02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 김형영

여보게 친구,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마음속의 무심한 미움일랑 꺼내진 말고 사세. 우리도 이젠 중늙은이 파도에 떠밀리는 통나무같이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남몰래 지은 죄 많아 낯 들고 살기 쉽지 않으니 죽은 듯이 살아서 하늘이나 바라보세. 눈 침침해 앞이 잘 안 보이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면 눈짐작으로라도 하늘 뚫은 별자리 하나 미리 봐두세. 내일 일을 생각하여 마음속에 묻어두세. -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 김형영 표출하지 못하는 화가 쌓이면 화병이 된다. 특히 한국의 중년 여성에게 화병이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화병(Hwa-Byung)'이라는 병명까지 만들었다니 말이다.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나 사회 구조가 여성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22.11.27

나의 장례식 / 임채성

눈물은 보이지 마라 내 앞에선 누구라도 슬픔을 꾸미려는 곡소리도 내지 마라 비로소 삶의 완성판 무아無我에 들었으니 추모를 꼭 하려거든 헤비메탈을 울려 다오 회심곡 장송곡이 빈소에 들지 못하도록 이승의 마지막 축제 걸판지게 놀아보자 빛깔부터 마뜩찮은 수의는 입지 않을래 리바이스 청바지에 빨간색 폴로셔츠면 물놀이, 꽃놀이 가듯 발걸음도 가볍겠다 다비 후 뼛가루는 먼바다에 뿌려 다오 내게 먹힌 광어 숭어 그 넋 다시 돌려 놓듯 그들의 살과 피가 돼 태평양을 누벼보게 - 나의 장례식 / 임채성 초등 동기인 S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왔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예후를 살핀 후 수술 여부를 결정한단다. 이제 우리는 노(老), 병(病), 사(死)의 단계에 진입했으며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 시기의 ..

시읽는기쁨 2022.11.22

도봉 / 박두진

산(山)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도봉(道峯) / 박두진 A로부터 박두진 시인을 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A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 그렇다면 60년대 후반이었겠지 - 학교 '문학의 밤' 행사 때 시인이 오셔서 문학반 친구들이 낭송한 자작시를 강평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첫 ..

시읽는기쁨 2022.11.12

행복호 / 윤보영

가을 타세요? 그럼 타세요 사랑으로 밀어드릴게요 - 행복호 / 윤보영 '타다'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다. 사전에 나온 설명은 이렇다. 타다 1. 탈것이나 짐승의 등 따위에 몸을 얹다. 2. 불씨나 높은 열로 불이 붙어 번지거나 불꽃이 일어나다. 3. 몫으로 주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받다. 4. 다량의 액체에 소량의 액체나 가루 따위를 넣다. 5. 먼지나 때 따위가 쉽게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다. 6. 부끄럼이나 노여움 따위의 감정이나 간지럼 따위의 육체적 느낌을 쉽게 느끼다. '가을을 탄다'라고 할 때의 '타다'는 6번의 의미이고, 시의 제목으로 쓰인 '행복호'는 1번의 의미로 쓰였을 테다.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이용한 재미있는 시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계절 변화로 나타나는 우울증을 가리킨다. 기온이 떨..

시읽는기쁨 2022.11.01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가을, 황금 들녘, 천고마비 풍요의 계절입니다. 아닙니다. 추풍낙엽, 스산한 산천 슬픔의 계절입니다. 그래요. 희로애락, 풍요와 빈곤 이율배반의 계절입니다. 미묘한 생각의 차이가 삶의 무게를 달리합니다. - 솔로몬의 계절 / 이영균 어제 친구와 통화하면서 옛 동료의 투병 소식이 화제에 올랐다. 누구보다 총명했던 분인데 지금은 인지 능력이 떨어져 친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횡설수설하신다는 전언이다. 세월 앞에서 누구나 스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그러면서 친구가 말했다. 통계에 의하면 80세까지 생존 확률이 30%라는 것이다. 지금 얼굴을 맞대는 친구들의 70%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때가 10년도 안 남았다. 물론 내가 포함될 확률도 70%다. 100세 시대라고 떠들면서 오래오래 살 것 같..

시읽는기쁨 2022.10.25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 남들은 모르거든. 내가 쓸쓸할 때, 친구들은 웃거든. 내가 쓸쓸할 때, 엄마는 다정하거든. 내가 쓸쓸할 때, 부처님은 쓸쓸하거든. 쓸쓸할 때 / 가네코 미스즈 부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 나와 한 몸이니까, 내가 쓸쓸할 때 같이 쓸쓸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남들은, 친구들은, 타인이니까 나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엄마는 우산을 내어주겠지만, 부처님은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주실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그런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고 있어야 할 거다.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의 시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쓸쓸해진다. 밤하늘의 별들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가네코 미스즈의 또 다른 쓸쓸한 시다. 짙어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우리 집 달리아 핀 날..

시읽는기쁨 2022.10.17

청량리역 / 서경온

중1 담임교사였을 때 가출한 학생을 청량리역에서 찾았다 자그마한 어깨에 아버지의 긴 낚싯대를 메고 있었다 본 적 없는 바다 가서 고기를 잡아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청량리, 중량교 가요"라는 버스 안내양의 다급한 외침이 "차라리 죽는 게 나요"라고 들린다던 60년대 어느 날 어린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희미한 제천역 대합실 불빛을 떠나 비 내리는 밤 청량리역에 내렸다 멀리 바라보이던 오스카극장의 휘황한 네온사인이 처음 보는 바닷속 찬란한 물고기들 같았다 - 청량리역 / 서경온 나 역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 청량리역이었다. 그 시절 서울로 오는 유일한 방법은 중앙선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완행과 급행이 있었는데 감히 급행을 탈 엄두는 못 내고 역마다 모두 서는 완행만 탈 줄 알았다. 자리가 안 나면 ..

시읽는기쁨 2022.10.09

혼자라서 / 이운진

썩 나쁜 일은 아닐 거야 구름의 지도를 그리고 꽃이 피는 속도를 알았으니까 정확히 몇 시에 대추나무가 가장 곧게 서는지도 알게 됐으니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없는지, 내 꿈은 왜 자꾸 무너지는지 생각하다가 뒤늦은 질투에 부끄러워지는 일 봄볕 같은 감정들을 혼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알겠어 - 혼자라서 / 이운진 인생이란 '혼자'와 '함께'의 균형/조화를 맞추는 일이 아닐까. 오청원 9단이 '바둑은 조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는 인생에도 마찬가지이지 싶다(마침 어제 우리나라의 오유진 9단이 오청원배 세계 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왕청신을 꺾고 우승을 했다). 조화가 양적인 중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와 '함께'의 비율을 5:5로 지킨다고 조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각자 타고난 성향..

시읽는기쁨 2022.09.29

아기 업기 / 이후분

아기를 업고 골목을 다니고 있자니까 아기가 잠이 들었다 아기는 잠이 들고는 내 등때기에 엎드렸다 그래서 나는 아기를 방에 재워놓고 나니까 등때기가 없는 것 같다 - 아기 업기 / 이후분 우리가 어렸을 적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상례였다. 농사철에는 일손이 부족해서 아이들의 작은 손이라도 빌려야 했다. 꼴을 베거나, 뒷산에서 땔감을 하거나, 또는 송아지를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풀을 뜯어먹게 하는 일은 남자아이들의 몫이었다. 그중에서 송아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제일 인기 있었다. 송아지는 제가 알아서 풀을 뜯고, 그동안에 우리는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한참 뒤에야 송아지가 없어진 걸 알았다. 온 동네가 난리가 났고, 저녁 느지막..

시읽는기쁨 2022.09.19

추석 만월 / 송진권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느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흘리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 추석 만월 / 송진권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다. 심..

시읽는기쁨 2022.09.12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이 올해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이발소'를 개업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웬 이발소? "라고 의아해했는데 '이야기발명연구소'의 줄임말이란다. 그리고 명..

시읽는기쁨 2022.09.08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불멸의 표절 / 정끝별

난 이제 바람을 표절할래 잘못 이름 붙여진 뿔새를 표절할래 심심해 건들거리는 저 장다리꽃을 표절할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할래 앙다문 씨앗의 침묵을 낙엽의 기미를 알아차린 아직 푸른 잎맥의 숨소리를 구르다 멈춘 바닥에서부터 썩어드는 자두의 무른 살을 그래, 본 적 없는 세상을 향해 달리는 화살의 그림자들을 표절할래 진동하는 용수철처럼 쪼아대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할래 허공에 정지한 별의 생을 떠받치고 선 저 꽃 한 송이가 감당했던 모종의 대역사와 어둠과 빛의 고비에서 나를 눈뜨게 하는 당신의 새벽 노래를 최초의 목격자가 되어 표절할래 풀리지 않는, 지구라는 슬픔의 매듭을 베껴 쓰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될래 다다다 나무에 구멍을 내듯 자판기를 두드리며 백지(白紙)의 ..

시읽는기쁨 2022.08.22

그냥 둔다 /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한다고 비워지고 내려놓게 되지야 않지만 일상이 비틀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늘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근심덩이다. 잔뜩 움켜쥐고는 힘들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의미 있음이나 없음으로 가치를 나눌 수 없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할 뿐 내 분별심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주관과 아집에 의해서 '있는 그..

시읽는기쁨 2022.08.16

어떤 진보주의자의 하루 / 신동호

오전 여덟 시쯤 나는 오락가락한다. 20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32퍼센트 정도는 보수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막둥이를 보면 늘 고민이다. 늘 고민인데 억지로 보내고 만다. 정확히 오전 열 시 나는 진보적이다. 보수 언론에 분노하고 아주 가끔 레닌을 떠올린다. 점심을 먹을 무렵 나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배고플 땐 순댓국이, 속 쓰릴 땐 콩나물해장국이 생각난다. 주식 같은 건 해 본 일 없으니 체제 반항적인 것도 같은데, 과태료나 세금이 밀리면 걱정이 앞서니 체제 순응적인 것도 같다. 오후 두 시쯤 나는 또 오락가락한다. 페이스북에 접속해 통합진보당 후배들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고 새누리당 의원의 글을 읽으면서 '좋아요'를 누르기도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41퍼센트 정도는 진보적이고 22퍼센트 정..

시읽는기쁨 2022.08.03

읽었구나! / 양애경

혜린이니 다혜니 하루에도 서너 건씩 비아그라 성인 음란광고가 이메일에 쌓여서 스팸신고 하다 하다 못해 5년 만에 답장을 했다 "저는 육십이 다 된 여자예요. 정력제 광고는 그만해주세요." 그 뒤, 이메일 제목이 달라졌다 비아그라 / 여성흥분약품 프리미엄 성인쇼핑몰 해외직수입 정품 아직 '여성흥분약품'이 남았구나, 그렇다면 "육십이 넘었다니까요." 이렇게 다시 답장을 해야 하나, 하다가 그나저나 신통방통하다 내 답장을 읽었구나! 누굴까 그 사람. - 읽었구나! / 양애경 나는 아예 모르는 이름의 발신 메일은 읽지를 않고 삭제한다. 열어봐야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긴요한 메일까지 삭제해서 낭패를 겪기도 한다.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블로그에도 댓글이 달린다. 반가워서 열어보면 반 정도는 비아그라 같은 정..

시읽는기쁨 2022.07.24

길 / 김시천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평생을 동무하여 함께 걸어갈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제 마음 다 퍼내어 서로의 먼지 낀 자리 병든 상처 씻어주고 마른 목 적셔주며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늘 비로소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먼길 앞에 두고 비록, 지금 가난하다 하여도 그러나 그것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오히려 정직하고 선량한 마음만으로 그렇게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지금 시작한다는 것은 - 길 / 김시천 오솔길, 언덕길, 숲길, 고갯길, 논두렁길, 밭두렁길, 꼬부랑길, 비탈길, 가시밭길, 벼룻길, 외퉁길, 후밋길, 한길, 지름길, 에움길, 거님길, 두멧길, 뒤안길, 발구길, 푸서릿길, 눈석잇길, 돌서덜길, 자..

시읽는기쁨 2022.07.19

풍경을 빌리다 / 공광규

정원이 아름다운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그냥 살던 집 벽을 헐고 창을 내어 풍경을 빌려 살기로 했다 오래된 시멘트 벽이었다 쇠망치로 벽을 치자 손목과 팔이 저려왔다 한번 더 힘껏 치자 어깨와 가슴까지 저려왔다 쇠망치를 튕겨내는 벽 반항하는 벽 대신에 서까래와 대들보만 울었다 "벽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것이여!" 지나가던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런가? 상처 난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돌아보는 사이 노인은 자취가 없다 헛것을 본 것인가 동네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벽을 치자 망치 두세방에 벽이 뻥 뚫렸다 하늘이 방 안으로 무너지고 햇살이 쏟아졌다 터진 벽에 창틀을 끼우고 유리를 붙이자 창문으로 감나무와 버즘나무와 잣나무와 숲이 선착순으로 들어오고 잣나무숲 뒤로..

시읽는기쁨 2022.07.10

여름밤 / 김용화

견우직녀 만난다는 칠석날 밤 감나무 아래 모깃불 올리고 떠꺼머리 총각들 모여 앉아 말미 받아 돌아온 머슴살이 성배 형 연애담을 듣노라면 별자리 돌아 밤은 깊어 산골짝 옹달샘 마을 처녀들 목욕하며 쫑알대는 소리 꺼벙이 노총각을 앞세워 조심조심 오리걸음으로 다가갈 때 자발없는 어느 놈, 킬킬대 판을 깨면 앙칼진 처녀들 목청은 밤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어 반짝이고 - 여름밤 / 김용화 마당에 멍석을 펴고 온 식구가 저녁 밥상을 마주한다. 매캐하면서 구수하기도 한 모깃불 연기가 바람 따라 식구들을 순서대로 만나고 지나간다. 엄마는 큰 양푼이에 보리밥과 푸성귀를 섞은 비빔밥을 만든다. 상 가운데는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다. 풀벌레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노랫소리로 요란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어디론가 흩..

시읽는기쁨 2022.07.03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 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사실 꽃 피어도 그다지 보는 사람은 없는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구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 상점에서 쌀 한 봉지 비름나물 한 묶음 ..

시읽는기쁨 2022.06.26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누군들 바라잖으리, 그 삶이 꽃이기를 더러는 눈부시게 활짝 핀 감탄사기를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이기를 - 꽃 또는 절벽 / 박시교 멀리 있는 신기루에 홀려 발 밑의 꽃밭은 보지 못한 채 허덕이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내 삶이 꽃이고, 감탄사인 것은 아닐까. 나는 장님이어서 보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무 많이 소유하고 지식이 넘쳐서 모든 것이 시시해진지도. '아, 하고 가슴을 때리는 순간의 절벽'에 서면 세상살이의 온갖 근심조차 꽃으로 알게 될까. 기쁨과 환희와 함께 근심과 시련의 꽃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아름다운 인생의 꽃밭을 보게 될까.

시읽는기쁨 2022.06.16

나는 투표했다 /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래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

시읽는기쁨 2022.06.02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시인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그것도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에 만나고 가는 바람이다. 바람 속에는 연꽃 향기 시들고 섭섭한 마음도 색이 바랜 뒤일 것이다.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바람은 돌고 돌아 다시 연꽃밭을 지나갈지 모른다. 전생에서 수없는 만남이 있었음을 바람은 눈치채지 못하리라. 향기를 머금고 다시 먼 길을 떠나는 바람은 조금은 섭섭해..

시읽는기쁨 2022.05.23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 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 그렇게 소중했던가 / 이성복 커다란 박에 구멍을 뚫고 안에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넣는다. 손을 박 안으로 집어넣은 욕심 많은 원숭이는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먹을 펴지 않으니 박에서 손을 빼낼 수..

시읽는기쁨 2022.05.11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멋진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속에 그리움 하나를 품고 있는 것일 게다. 그리움은 그가 내 옆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결핍의 감정이다. 어쩌면 소유욕의 일종인지 모른다. 사전에서는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움 중에는 짝사랑 같은 일방통행식 그리움도 있고, 사람이 아닌 추상적인 대상에 대한..

시읽는기쁨 2022.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