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도봉 / 박두진

샌. 2022. 11. 12. 10:49

산(山)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도봉(道峯) / 박두진

 

 

A로부터 박두진 시인을 뵌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A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 그렇다면 60년대 후반이었겠지 - 학교 '문학의 밤' 행사 때 시인이 오셔서 문학반 친구들이 낭송한 자작시를 강평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때 시인의 첫 마디가 이랬단다.

"여러분, 박목월 시인 잘 아시죠? 조지훈 선생님도 잘 아시지요? 저는 박두진인데 여러분, 저는 잘 모르시지요?"

A는 시인이 겸손하게 말씀하시던 그 장면을 50년도 넘은 지금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인의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그때 우리는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을 청록파 시인으로 외우고 있었다. 앞의 두 분에 비해 박두진 시인은 덜 주목받은 게 사실이었다. 박목월 시인의 '윤사월' '나그네',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교과서에는 박두진 시인의 어떤 시가 실려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이 시 '도봉'이 아니었을까.

 

"황혼과 함께 /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 시를 나지막이 낭송하다 보면 이 대목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도봉'은 시인이 20대 때 쓴 시란다. 당연히 시인의 말년쯤 썼겠지 생각했는데 너무 의외였다. 20대의 나이에 어떻게 인생을 다 살아본 듯한 이런 비감에 젖을 수 있을까. 가을 산속에서 느끼는 시인의 고독과 쓸쓸함이 70대가 된 나에게도 절절히 전해진다. "생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 아무래도 자꾸 읊조리게 될 것 같은, 이 가을에 시인이 나에게 준 한 문장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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