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게 친구,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마음속의
무심한 미움일랑
꺼내진 말고 사세.
우리도 이젠 중늙은이
파도에 떠밀리는 통나무같이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남몰래 지은 죄 많아
낯 들고 살기 쉽지 않으니
죽은 듯이 살아서
하늘이나 바라보세.
눈 침침해 앞이 잘 안 보이면
돋보기 안경을 쓰고,
안경을 써도 잘 안 보이면
눈짐작으로라도
하늘 뚫은 별자리 하나
미리 봐두세.
내일 일을 생각하여
마음속에 묻어두세.
-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 김형영
표출하지 못하는 화가 쌓이면 화병이 된다. 특히 한국의 중년 여성에게 화병이 많다고 한다. 오죽하면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화병(Hwa-Byung)'이라는 병명까지 만들었다니 말이다.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나 사회 구조가 여성에게 스트레스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이제는 가정생활보다 직장과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 비중도 만만찮아졌다.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기회가 많은 남성보다 여성이 화병에 취약한 것 같다.
내 동년배들 중에는 나라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데서 울화를 느끼는 이들이 여럿 있다. 진보나 보수 공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다. 나를 포함해서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면 이런 스트레스는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정 신념에 사로잡히거나 집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가정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아니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든 개인의 편협한 시각이 스트레스의 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화병을 남 탓으로 돌려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화를 푸는 게 중요하지만 화를 푼다고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서는 곤란하다. 자기 스트레스는 해소할지 몰라도 상대에게 그 짐을 넘기기 때문이다. 스스로 삭여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제일이다. 노년의 원숙함이란 다른 게 아니다. 시인은 노래한다. "남 몰래 지은 죄 많아 / 낯 들고 살기 쉽지 않으니 / 죽은 듯이 살아서 / 하늘이나 바라보세." 이젠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다. 마음속에 묻어둔다고 부패하는 것은 아니다. 향기롭게 발효할 수도 있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에 있는 노인 / 에드워드 리어 (0) | 2022.12.09 |
---|---|
어머니 / 이시영 (0) | 2022.12.02 |
나의 장례식 / 임채성 (0) | 2022.11.22 |
도봉 / 박두진 (1) | 2022.11.12 |
행복호 / 윤보영 (0) | 2022.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