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머니 / 이시영

샌. 2022. 12. 2. 10:53

어머니

이 높고 높은 아파트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살아가시는 당신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듭니다

죽어도 이곳으론 이사 오지 않겠다고

봉천동 산마루에서 버티시던 게 벌써 삼 년 전인가요?

덜컥거리며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아직도 더럭 겁이 나지만

안경 쓴 아들 내외가 다급히 출근하고 나면

아침마다 손주년 유치원길을 손목 잡고 바래다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하루 일거리

파출부가 와서 청소하고 빨래해주고 가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외치고 가고

계단 청소 하는 아줌마가 탁탁 쓸고 가버리면

무덤처럼 고요한 14층 7호

당신은 창을 열고 숨을 쉬어보지만

저 낯선 하늘 구름조각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허리 펴고 일을 해보려 해도

먹던 밥 치우는 것말고는 없어

어디 나가 걸어보려 해도

깨끗한 낭하 아래론 까마득한 낭떠러지

말 붙일 사람도 걸어볼 사람도 아예 없는

격절의 숨 막힌 공간

철컥거리다간 꽝 하고 닫히는 철문 소리

어머니 차라리 창문을 닫으세요

그리고 눈을 감고 당신이 지나쳐온 수많은 자죽

그 갈림길마다 흘린 피눈물들을 기억하세요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광주 종방의 방직여공이 되었던 게

추운 열여덟 살 겨울이었지요?

이 틀 저 틀로 옮겨다니며 먼지구덕에서 전쟁물자를 짜다

해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시집이라 보내준 것이 마름집 병신 아들

그 길로 내차고 타향을 떠돌다

손 귀한 어느 양반집 후살이로 들어가

다 잃고 서른이 되어서야 저를 낳았다지요

인공 때는 밤짐을 이고 끌려갔다

하마터면 영 돌아오지 못했을 어머니

죽창으로 당하고 양총으로 당한 것이

어디 한두번인가요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사람이 들어오면 밤사람에게 밥해주고

이리 뺏기고 저리 뜯기고

쑥국새 울음 들으며 송피를 벗겨

저를 키우셨다지요

모진 세월도 가고

들판에 벼이삭이 자라오르면 처녀적 공장노래 흥얼거리며

이 논 저 논에 파묻혀 초벌 만벌 상일꾼처럼 일하다 끙

달을 이고 들어오셨지요

비가 오면 덕석걷이, 타작 때면 홑태앗이

누에철엔 뽕걷이, 풀짐철엔 먼 산 가기

여름 내내 삼삼기, 겨우내내 무명잣기

씨 부릴 땐 망태메기, 땅 고를 땐 가래잡기

억세고 거칠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머슴들 속에 서면 머슴

밭고랑에 엎드리면 여름 흙내음 물씬 나던

아 좋았을 어머니

그 너른 들 다 팔고 고향을 아주 떠나올 땐

나 죽으면 일하던 진새미밭 강 묻어 달라고 다짐다짐 하시더니

오늘은 이 도시 고층아파트의 꼭대기가

당신을 새처럼 가둘 줄이야 어찌 아셨습니까

엘리베이터가 무겁게 열리고 닫히고

어두운 복도 끝에 아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리면

오늘도 구석방 조그만 창을 닫고

조심조심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는

흰 머리 파뿌리 같은 늙으신 어머니

 

- 어머니 / 이시영

 

 

친구 모친이 돌아가셔서 온양에 문상을 다녀왔다. 부고에 보니까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셨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친구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전달되어 와서 왕래한 길이 내내 스산했다. 시난고난하긴 했지만 다행히 친구 모친은 마지막 두 달만 요양병원 신세를 지셨을 뿐 편안하게 가셨다고 한다. 호상이어서 장례식장 분위기도 차분했다.

 

다들 일흔줄에 들다보니 부모님이 생존하신 경우가 드물다. 연락이 되는 초등과 대학 동기 스물여 명 중에서 부친은 딱 한 분, 모친은 서너 분쯤 남아 계신다. 연세는 다들 아흔이 넘으셨다. 나도 그중에 속해 있다. 지금 같은 건강이라면 외할머니처럼 어머니도 백수를 넘기실 것 같다. 아직도 천 평 밭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누구나 놀란다.

 

우리 세대의 어머니들은 일본 강점기 때 소녀 시절을 보냈고, 갓 시집을 갔을 때 육이오를 겪었으며, 그 뒤로 가난한 살림을 맡아 논과 밭에서 뼈빠지게 일하신 분들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숨은 주역들이시다.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책 열 권도 모자란다는 말을 흔히 하지만 우리 어머니들에게 해당하는 게 아닌가 싶다. 힘든 시대를 이기고 살아내신 모든 어머니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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