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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 이상국

차 문을 열어두었더니 밤 사이에 뒷좌석과 앞좌석 사이에 거미가 집을 지었다 그러면 거미의 밥을 위하여 나비나 파리도 들어올 수 있게 계속 문을 열어두어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나와 미국의 무역센터 빌딩이 쓰러지는 걸 바라보며 어디서 많이 본 비디오 게임 같다거나 북조선이 핵실험을 해도 애써 눈도 꿈쩍하지 않는 이 나는 다르다 그러나 사무실 유리벽에 머리를 박고 죽은 이름 모를 새의 주검을 냇가에 묻어 주고 한나절 소주로 음복을 하면서도 시장바닥을 배로 밀고가는 사람의 돈통에 동전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는 또 같은 사람이다 한 때 이런 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언제부턴가 내가 모든 저들일지 모른다는 그런 되지도 않은 생각 때문에 같은 나와 다른 나는 날마다 싸운다 오늘도 시청 민원실에 들어가..

시읽는기쁨 2016.01.03

염치

염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상한다. 내 경우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 때문에 신경 쓰이는 때가 많다. 바깥 경치를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공상을 하는 중에 옆에서 들리는 소음은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긴급한 연락도 아니고 잡담 수준의 통화를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계속하는 사람이 꼭 있다. 남의 사생활 얘기를 억지로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이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태도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기 때문이다. 조심해야 한다는 걸 의식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자기만 아는 이런 사람을 보고 염치 없다고 말한다. 공공장소에서는 이런 염치 없는 자가 항상 있다. 어찌 보면 작은 일일 수도 ..

참살이의꿈 2015.09.21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 프란시스 잠 우리는 너무 거창한 걸 좇는 건 아닐까. 그래서 작은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행복을 찾아 멀리 나가보..

시읽는기쁨 2015.09.18

쓴맛이 사는 맛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노인이 되면 대체로 고집불통의 꼰대가 된다. 노년의 문화라 부르는 것도 즉물적이고 쾌락적인 것에 만족하는 수준이다. 시대를 고뇌하며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노인은 드물다. 작년 신문 보도를 통해 채현국 선생을 처음 알았다.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라는 제목의 젊은이에게 주는 일갈이 시원했다. 선생의 삶과 생각을 소개하는 이 책 을 읽으며 선생의 진면목을 다시 대하게 되었다. 참 독특한 분이라는 느낌이 신선했다. 선생을 수식하는 말들을 보면 선생이 어떤 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거인, 기인, 거리의 철학자,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째 안에 들었던 거부, 탄광 사고가 난 뒤 사업을 정리해서 나누어준 사업가,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

읽고본느낌 2015.07.29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을 다룬 책인데 시종 미소를 띠며 읽힌다. 구성도 특이하다. 나이별로 인체의 변화에 대한 과학적인 데이터가 제시되는 사이에 저자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에세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나이듬과 죽음에 대한 여러 경구들이 인용되고 있다. 셋이 어긋나지 않고 잘 조화를 이룬다. 저자인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책을 덮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죽음에 대한 가르침보다도 이런 스타일의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과학적 사실과 정서적 느낌을 연결시키면서 개인의 경험을 함께 녹여내는 형식이 마음에 든다. 주제를 잘 골라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만큼 명확한 진실은 없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죽음에 대해서는 짐짓 외면하..

읽고본느낌 2015.06.27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 / 신현림

슬퍼하지 마세요 세상은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자살한 장국영을 기억하고 싶어 영화 '아비정전'을 돌려 보니 다들 마네킹처럼 쓸쓸해 보이네요 다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하고 아프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들 따뜻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전쟁으로 사스로 죽어가더니 우수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살자들 살기엔 너무 지치고, 휴식이 그리웠을 거예요 되는 일 없으면 고래들도 자살하는데 이해해 볼게요 가끔 저도 죽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죽지는 못해요 엄마는 아파서도 죽어서도 안 되죠 이 세상에 무얼 찾으려 왔는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마음을 주려 하면 사랑이 떠나듯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하면 절벽이 달려옵니다 시를 쓰려는데 두 살배기 딸이 함께 있자며 제 다릴 붙잡고 사이렌처럼 울어댑니다..

시읽는기쁨 2015.04.12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시리즈로 나오는 작가수업 과정의 1권이다. 작가가 되려는 것과는 관계없고 제목이 멋있어서 읽었는데 지은이의 글맛에 반했다. 글을 어쩌면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난다. 강의록에 기초한 구어체여서 더욱 그랬다. 쉽게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것 같다. 더구나 딱딱한 문학론인데 말이다. 지은이 김형수 씨는 3부작으로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1부는 문학관, 2부는 창작관, 3부는 작가관인데 이 책 창작에 필요한 예비지식들과 그 가치관을 다루는 문학관에 속한다. 2부의 제목은 로 정해졌다는데 벌써 기대가 된다. 이 책은 작가수업에 한정된 게 아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진정한 예술가는 예술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란 '세상을 다르게 보..

읽고본느낌 2014.12.29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배 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유는 엉뚱했다. 해 뜨고 지는 풍경을 실컷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가당찮은 얼굴로 보는 것이었다. "야, 일하다 보면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른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아마 한 달 동안 원양어선에서 생활한다면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할 게 틀림없다.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만 지나도 시들해질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일상이 되면 무감각해진다. "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거기에서 3일밖에 못 머물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본 구절에 무릎을 쳤다. 대상이 무엇이든 딱 사흘만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아름답고 귀하지 않은 게 있을까. 지루하기만 한 오늘도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이고, 아내의 잔소리마저 꾀꼬리의 지저귐으로 변할 것이..

참살이의꿈 2014.11.09

도시에서 산다는 것

앞집이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서로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벨을 누를 수도 없다. 현관 앞 복도에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가 있는 걸로 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집인 것 같다. 아파트에서의 삶이 너무 삭막하다. 서로 간섭 안 하는 익명성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여기가 사람 사는 동네가 맞나 싶다. 우리 아파트는 한 층에 네 가구가 사는데 입주한 지 4년이 되어 가지만 어느 집과도 정식으로 인사하지 못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어색한 눈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나마 윗집과는 몇 번 오갔는데 슬프게도 소음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굴이 익다고 이젠 밖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

참살이의꿈 2014.09.28

쏘주 한 잔 합시다

선 굵은 남성적인 글을 쓰는 유용주 님의 산문집이다. 치열하게 삶을 사시는 분답게 글에서도 불꽃 같은 뜨거움이 느껴진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온갖 궂은 일터를 전전한 경험이 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속에는 따스하고 섬세한 감성이 살아 숨 쉰다. 입담 좋은 분답게 글도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힌다. 체험에서 나온 글은 힘이 있다. 삶과 싸움을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의 차이다. 나 같은 백면서생은 이런 분이 무척 존경스럽다. 수많은 전투를 치러낸 백전노장의 위엄 앞에서 주눅이 든다. 더구나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슬픔과 분노를 안으로 쌓아야 내공이 생긴다. 지은이에게는 삶 자체가 문학이다. 전에 나왔던 산문집 의 첫머리가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로 시작된다. 는 전작의 연장이..

읽고본느낌 2014.09.10

빵집 /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씌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 / 이면우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시내 초입에 타이어 가게가 있다.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는 곳인데, 가게에 적힌 문구 하나가 늘 눈길을 끈다. "아기 우유값만 남기고 드립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짠해서 쳐다볼 수 없었다. 자주 보니 조금은 덤덤해졌으나 밥벌이의 엄숙함..

시읽는기쁨 2014.09.07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한밤중에 깨어나 다시 잠들지 못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머리가 복잡해졌다. 요사이는 '산다는 게 뭔지'를 중얼거리는 일이 잦았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들어 깜깜한 시간을 때웠다. 에 나오는 글로 위안되는 바가 컸다. "역경에 부딪쳤을 때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는가?' 하고 의기소침할 일은 아니다. 그런 때일수록 '이제야 성숙할 기회를 맞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가 곧 자기의 미래를 좌우한다. 결정권은 바로 지금 자신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기에 자기를 돌아보라 하는 것이니 현실의 고(苦)나 인과(因果) 등은 그대로 수련 과정인 셈이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치면 오히려 나쁜 공기와 먼지 그리고 불결한 것들을 다 청소시켜주니, 현실의 고..

참살이의꿈 2014.04.18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휴대폰을 끄고 연락을 끊은지 석 달이 되어간다. 몇 친구에게는 잠수중이라고 알렸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무 소식 주지 못했다...

시읽는기쁨 2014.03.28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한 구절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시가 있다. 이 시의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도 그렇다. 무언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이 구절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게 인생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슬픔..

시읽는기쁨 2014.02.22

삶이란 무엇인가

심란한 차에 읽게 된 책이다. 제목은 로 '안도현 아포리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내용을 보니 안도현 씨가 쓴 여러 책에서 뽑은 글 모음집이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말한다.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는데 초판 7쇄까지 간 걸 보니 지은이의 이름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 글 중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데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때가 때여선지 모르겠다. 삶이란 무엇인가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 보자, 자기 자신을 달래면서 스스로를 때리며 페달을 밟는 발목에 한 번 더 힘을 주는 것.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이 쌓..

읽고본느낌 2014.01.06

식사의 품위

아내가 날 편하게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먹는 데에 무던한 것이다. 이제껏 반찬 투정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식사는 간소한 게 좋다는 주의라 군대식대로 늘 1식3찬을 강조한다. 있는 반찬 아무거나 한두 개만 있으면 만족한다. 배고플 때 냉장고를 열고 혼자서도 잘 챙겨 먹는다. 부엌 출입하는데 남편 아내의 구별이 없다.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어도 다행히 삼식이 새끼라는 핀잔은 듣지 않는다. 그래서 유별나게 반찬 투정을 하거나 식탐(食貪)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까지는 좋으나, TV의 음식점 소개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정말 꼴불견이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먹는 걸 탐하는 걸 보면 측은해 보인다. 사는 게 너무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

참살이의꿈 2013.11.04

바쁜 10월

이번 10월만큼 바쁜 달도 없다. 내 특기인 아무 일 없이 집에서 논 날이 몇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특히 후반부에는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분주했다. 18일 ~ 21일 전주와 고창 방문 22일 ~ 24일 가평으로 가족여행 25일 휴식 26일 ~ 27일 경떠회 여행 28일 ~ 29일 전주 상가 조문 30일 서울에서 바둑 31일 ~ 11월 1일 홍성 지역 여행 예정 전반부에도 3박4일과 1박2일의 여행이 두 번 있었다. 역마살이 낀 달이다. 이러니 피로를 풀 시간도 없이 다음 피로가 몰려온다. 약속된 것이니 일정을 취소하기도 어렵다. 몸은 피곤해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없으니 그나마 버틸만하다. 몸살기가 나타나더라도 잠을 잘 자니 바로 회복된다. 나에게는 잠이야말로 보약이다. 가끔 너무 피곤할 때는 ..

길위의단상 2013.10.31

삶은 단순하고 내 몸은 튼튼하니까

이름난 현사(賢士)의 수사학적 명언보다 평범한 사람의 보통 말에 감동할 때가 있다. 필리핀 시골 마을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어부가 자신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삶은 단순하고 내 몸은 튼튼하니까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프로그램에서였다. 인류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건 고작 100여 년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대부분 기간은 농경을 중심으로 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삶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이웃과의 관계는 따스했다. 서로 도우며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게 많았을지라도 현대적 의미의 가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풍족해도 과잉 욕망과 상대적 결핍이 빈곤을 생산한다. 필리핀 어부가 한 말 속에 ..

참살이의꿈 2013.10.15

식사법 /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을 잘 넘길 것 - 식사법 / 김경미 "밥 먹을 때는 말 하는 게 아니다." "음식 넘기는 소리도 내지 마라." 어릴 때 받았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그때는 열 명이나 되는 식..

시읽는기쁨 2013.10.12

걱정하지 마

"어떻게 지내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지 뭐." "일산 킨텍스의 건축 박람회 보러 가자." "나가는 것도 귀찮다. 그냥 집에 있는 게 편타." "야, 너무 그러면 폐인 된다. 바깥바람도 쐬고 그래." "알겠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뭣 하고 있어?" "똑같지 뭐. 집에 있어." "답답하지 않냐?" "답답하긴, 이게 편하고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하여튼 희한타." "......." 최근에 두 친구와 통화한 내용이다. 집에서 할 일 없이 논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다. 한 친구는 끔찍하게도 '생지옥'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사업하는 친구인데 그는 지금까지 일 없이 집에서 놀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닥치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남자가 집에서 빈둥거리면 왜 안 되는 ..

길위의단상 2013.09.03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

시읽는기쁨 2013.08.09

그늘 속을 걷다

소설가 김담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구해 읽은 책이다. 자전적 에세이인 이 책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담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초등학생일 때 성남으로 이사했다. 전형적인 이농 가정이었다. 변두리 도시에서 사는 가난한 이농자의 생활은 궁핍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어렵게 학업을 계속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현실에 눈을 떴고 학생 운동에도 참여했다. 독서와 밑바닥 삶의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그러나 어디에도 깊이 몰두하지는 못했다.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간 부모님을 따라 다시 귀향했다. 낯선 고향이었지만 이웃과 숲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다. 고성은 남북 분단의 비극이 현존하는 곳으로 저자가 현대사의 아픔을 그려내고 싶어하는 무대다. ..

읽고본느낌 2013.08.06

착하게 살자

예전에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고 들었다. 책, 영화, 이야기에도 권선징악 내용이 많았다. 학교에 아이를 맡기면서 선생님에게는 때려서라도 인간이 되게 해 주십시요, 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는 강조하지 않는다. 까놓고 말해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제일 목표가 된 것이다. 그래야 좋은 상품이 되고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하다는 게 미덕이 못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요사이는 동화에도 착한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 나온다. 물론 착함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 진짜 착한 게 뭔지 아이들에게 생각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것이다. 밖에서 만난 낯선 사람의 친절을 경계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과 비슷하다. 에..

참살이의꿈 2013.07.17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얼마 전 KBS TV '아침마당'에 이근후 선생 부부가 출연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름답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마침 선생이 펴낸 책이 있어 찾아 읽어 보았다.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이라는 부제가 붙은 라는 책이다. 선생은 굉장히 활발하고 적극적이시다.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분이다. 이화여대 정신과 교수로 퇴직하신 뒤에도 네팔 의료봉사, 청소년 상담, 보육원 봉사, 석불 연구, 부모와 노인 교육, 연구 활동 등을 왕성하게 하신다. 특히,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 수석 졸업하기도 했다.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이나 당뇨, 고혈압, 통풍, 디스크 등 여러 가지 병도 장애가 되지 못한다. 선생의 장..

읽고본느낌 2013.06.12

늙을수록 사람들 속에서

오래전부터 내 꿈은 사람들과 세상에서 벗어나 적막강산에 들어가 사는 것이었다. 모든 욕심 내려놓고 산과 나무와 풀로만 친구하며 살고 싶었다. 사람 소리가 절절히 그리워지도록 철저히 홀로이고 싶었고 외로워지고 싶었다. 나름대로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인간에게 너무 부대낀 게 원인이었지만 그것 역시 내 천성이 그러한 탓이었다. 퇴직을 하고 광주로 내려와서는 인간과의 마찰은 거의 사라졌다. 여기가 산골 초막은 아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강원도 심심산골과 별로 다르지 않다. 아침이면 새 소리가 잠을 깨우고, 봄이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진동한다. 창문을 열면 맑은 공기에 풋풋한 시골 냄새가 풍긴다. 종일 있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많다. 그러다 보니 적막강산에 대한 꿈도 많이 시들해졌다. 굳이 파라다..

참살이의꿈 2013.05.26

자꾸 늘어나는 모임

퇴직하면서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지내고 싶었다. 인생의 한 매듭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마침 서울을 벗어나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되어 잘 됐다 싶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과 만나는 모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핑계인지 모르지만 인간관계를 칼로 무 자르듯 할 수는 없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할 것 같다. 겉과 달리 내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사람들마저 만나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 갇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의 부부 모임이 생겼다. 성당에 다니는 여인네들끼리 반모임을 하다 보니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남자들도 포함시키자고 해서 부부 모임으로 확대되었다. 나로서는 꺼려지는 조건만 갖추고 있어 나가지 ..

길위의단상 2013.04.25

용서할 수 없는 습관에서 떠나라

1년 가까이 목욕탕엘 안 가고 있다. 귀 안에 있는 염증 때문이다. 그동안 수없이 이비인후과를 들락거렸지만 완치되지 않았다. 낫는 것 같다가도 이내 재발한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아주 상극이다. 그래서 병원 치료보다는 내가 고쳐보자, 하고 목욕탕 출입을 끊었다. 병원에서 쓰는 적외선 온열기도 샀다. 집에서 샤워도 드물게 하지만, 하고 나면 적외선으로 귀를 말린다. 덕분에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목욕탕에 가질 않으니 때를 밀 일이 없다. 처음에는 몸에 뭐가 기어다니는듯 스물거렸으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도리어 때를 미는 게 이상해 보인다. 이태리 타올을 사용하는 게 기분은 개운하지만 피부에는 좋을 것 같지 않다. 도살장의 털 뽑힌 돼지처럼 때밀이 앞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되니 좋은 점이 더 많다. 반대로 ..

참살이의꿈 2013.02.18

저녁이 있는 삶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한 후보의 구호가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구호로만 치면 단연 대통령 후보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만큼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위무해 줄 말이 있을까 싶다. 회사에 다니는 자식을 보면 이게 사람이 사는 삶인가 싶어진다. 거의 매일 야근에 밤 10시가 넘어야 퇴근이다. 부부가 맞벌이하는데 둘 다 사정이 비슷하다. 즐거운 일이라도 밤낮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면 짜증이 안 생길 리 없다. 얘기를 들어보면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다. 평일에 가정생활이 불가능한 건 물론 어떤 때는 주말도 없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일을 시키고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한은 총재가 '야근도 축복'이라는 말을 했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변명은 했..

참살이의꿈 2012.10.19

우리의 일상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활동할 때마다 그리고 거래할 때마다 기록되고, 등록되고, 과세되고, 날인되고, 측정되고, 숫자가 매겨지고, 평가되고, 허가되고, 인가되고, 경고를 받고, 금지되고, 선도되고, 교정되고, 처벌받는 것이다. 그것은 공익이라는 구실 아래 그리고 일반의 이익이라는 이름 아래 기부금 납부를 강요받고, 훈련을 받고, 배상금을 물고, 착취당하고, 독점의 희생자가 되고, 탈취당하고, 쥐어짬을 당하고, 현혹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사소한 저항을 하기만 해도, 불만의 '불'자만 꺼내도 억압당하고, 벌금이 부과되고, 멸시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추적되고, 학대를 받고, 구타를 당하고, 무장해제되고, 질식당하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고, 추방되고, 희생되고, 팔려가고..

참살이의꿈 201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