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샌. 2014. 3. 28. 07:59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휴대폰을 끄고 연락을 끊은지 석 달이 되어간다. 몇 친구에게는 잠수중이라고 알렸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무 소식 주지 못했다. 앞으로 서너 달은 더 지나야 수면 위로 나올 것 같다. 그래도 내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심해에서 들끓는 요동과는 달리 표면은 조용하다. 폐사지의 비움, 쓸쓸함, 헛헛함이 오늘의 나를 닮았다. 어찌 되었든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 폐사지처럼 산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 내 대답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