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다읽(5) - 조화로운 삶

내 밤골 생활의 모델이 되었던 책이다.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는 1932년에 뉴욕을 떠나 버몬트 산골에서 20년 동안 현대 문명을 벗어난 대안적 삶을 살았다. 이 책 은 그들의 꿈과 이상을 실천해 나간 삶에 대한 성실한 기록이다. 단순함, 고요한 생활, 가치 있는 일, 조화로움이 그들이 추구한 삶의 기본 가치였다. 화폐에 의존하지 않는 자급자족의 삶을 도시에서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고, 해답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버려진 농장에서 새로운 삶을 실험했고, 생각과 생활이 일치하는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두 사람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은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

읽고본느낌 2020.09.20

여름휴가 / 신미나

불이 잘 안 붙네 형부는 번개탄 피우느라 눈이 맵고 오빠는 솥뚜껑 뒤집어 철수세미로 문지르고 고기 더 없냐 쌈장 어딨냐 돗자리 깔아라 상추 씻고 마늘 까고 기름장 내올 때 핏물이 살짝 밸 때 뒤집어야 안 질기지 그럼 잘하는 사람이 굽든가 언니가 소리 나게 집게를 내려놓을 때 장모님도 얼른 드세요 차돌박이에서 기름 뚝뚝 떨어질 때 소주 없냐 글라스 내와라 아버지가 소리칠 때 이 집 잔치한댜 미희 엄마가 머릿수건으로 탑새기를 탁탁 털며 마당에 들어설 때 달아오른 솥뚜껑 위로 치익 떨어지는 빗방울 비 온다 - 여름휴가 / 손미나 여름휴가를 잃어버린 2020년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서 아쉬워 말자. 모든 관계를 재점검하라고 코로나가 준 선물인지 모른다. 우리가 과연 제대로 살아왔던가? 사람과 일, 자연과의 ..

시읽는기쁨 2020.09.08

중은(中隱) / 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

시읽는기쁨 2020.07.14

메멘토 모리

로마 시대 때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하면 환영 퍼레이드를 했다. 당사자는 마치 최고 권력자나 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장군 옆에 탑승한 노예가 개선 행진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장군에게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쳤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잔칫날에 재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관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게 대단하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잘 나갈 때 도리어 겸손하게 행동하라. 교만하지 말라."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현재 삶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메멘토 모리'와 비슷한 말로 '이 또한 ..

참살이의꿈 2020.07.04

다르게 살아보기

"감옥살이하느라 죽을 지경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집 안에서 갇혀 지내야 하는 친구가 한 말이다.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 친구니 그럴 만도 하다. "야, 이럴 때 좀 다르게 사는 방법을 배워 봐." 나는 친구와 달리 평소에도 방콕 형이다. 코로나19라 해도 별로 다른 게 없다. 오랜만에 큰소리칠 기회가 찾아왔다. 잠잠하던 우리 동네에도 확진자가 생겼다. 이웃 아파트에 사는 40대 남자가 양성 판정을 받았다. 하루가 지나니 동선이 공개되었다. 확진 판정받기 전 며칠간 그가 들린 장소가 시간대별로 상세히 드러났다. "뭘 이렇게 싸돌아다녔지?"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인데 분주하게 산 게 한눈에 보였다. 점심 00음식점, 저녁 00음식점, 00당구장, 00치킨집 등 상호명만 바뀔 뿐 ..

참살이의꿈 2020.03.15

다람쥐가 되어 간다

# 1 공돈 20만 원이 두 달 전에 생겼다. 요긴할 때 쓰려고 책장에 있는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 젊을 때부터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 두곤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으면 아무 때나 꺼낼 수 있으니 비밀 보관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심이 간다고 많은 책을 전부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돈이 필요해서 책장 앞에 섰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손이 자주 가는 책을 중심으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아무리 두 달 전 상황을 더듬어도 깜깜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20만 원은 훗날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졌다. # 2 도서관에 갈 때마..

길위의단상 2020.02.06

가벼운 금언 / 이상희

- 기적을 믿니? 이렇게 낡은 손으로 쓰는 약속을, 사랑을 너는 믿겠니? 빈 식기食器를 햇볕에 널고 오늘은 가벼운 금언을 짓기로 한다. 하루에 세 번 크게 숨을 쉴 것,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 머리를 두고 누워 좋은 결심을 떠올려 볼 것, 시간의 묵직한 테가 이마에 얹힐 때까지 해질 때까지 매일 한 번은 최후를 생각해 둘 것. - 가벼운 금언 / 이상희 젊었을 때 늙은 내 모습을 상상한 적이 있었을까?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젊을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그래, 잘 익어가고 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여줄까? 아니면 실망 가득한 얼굴로 씁쓸하게 바라볼까? 가끔 그런 게 궁금할 때가 있다. '맑은 강과 큰 산이 있다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둘 것'이라는 ..

시읽는기쁨 2020.01.29

나이 / 이븐 하짐

누군가 나에게 나이를 물었지. 세월 속에 희끗희끗해진 머리를 보고 난 뒤 내 이마의 주름살들을 보고 난 뒤. 난 그에게 대답했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사실 난 아무곳도 세지 않으니까. 게다가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는. 그가 나에게 말했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난 말했지. 어느 날 불시에 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이에게 입을 맞추었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을. 나의 날들이 너무도 많지만 나는 그 짧은 순간만을 세지.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말로 나의 모든 삶이었으니까. - 나이 / 이븐 하짐 괴테가 그랬던가.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하루가 채 안 된다고. 우리가 볼 때 세상의 복이란 복은 혼자 독차지한 것 같은 괴테인데, 인간에게 ..

시읽는기쁨 2020.01.15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누가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본 짧은 문장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가끔 독백하듯 되뇌면 왠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글쓴이의 의도는 잊어버렸지만 지금은 내 식대로 해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그냥'의 뜻을 나는 '생각 없이' '편하게' '고통 없이' 등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개똥철학일 망정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삶의 지표가 있다.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며 살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가치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냥 거저먹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 부러울 것 같이 사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다 자기 몫의 고뇌와 고통..

참살이의꿈 2019.12.04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 이 넉넉한 쓸쓸함 / 이병률 일행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버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화사한 가을 햇살에 끌려 중간에 내..

시읽는기쁨 2019.10.25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보면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찾아오는 횟수가 하루에 500~900번 정도다. 가끔 1천 회가 넘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2천 회를 넘은 날이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다.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는가 봤더니 박노해의 '동그란 길로 가다'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동그란 길로 가다'는 2012년 5월에 블로그에 올렸는데, 하루에만 이 시를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확인차 내 블로그에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시를 다시 읽어본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

길위의단상 2019.10.23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김규항 선생의 아포리즘이다. 선생의 글에서 핵심 되는 부분을 모았기 때문에 선생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선생의 주장에는 동의되는 부분이 많다. 선생의 글은 간결하면서 주장이 선명하다.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이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

읽고본느낌 2019.09.25

열심히 안 살아 다행이다

아흔이 가까워지면서 어머니는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말을 자주 하신다. 죽을 둥 살 둥 일만 열심히 하면서 살았더니 다 헛것이었다. 너희들은 나같이 바보로 살지 마라. 좋은 데 돌아다니고, 맛있는 것 먹고, 건강을 챙겨라. 늙고 아프면 모든 게 쓸데없다. 인생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식으로서는 마음이 아프다. 잘 못 해 드리는 게 있지 않나 싶어서다. 어머니는 그래도 둘째네와 살고 있지만, 고향의 다른 노인은 독거로 지내시는 분이 많다. 자식이 많지만 전부 외지에 나가 있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외로워서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병과 외로움은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에 부딪히는 실존의 문제다. 따져보면 인생은 어차피 혼자이고, 생로병사는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나만 특별할 수가 없다...

참살이의꿈 2019.04.09

프리터

프리터(Freeter)란 프리(Free)와 아르바이터(Arbeiter)의 합성어로,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해결하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어쩔 수 없이 프리터가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진정한 프리터는 정규직을 자의로 포기하고 최소한의 일을 하는 선택하는 사람이다. 한 달에 100만 원 정도의 수입으로 살아갈 자신이 있어야 한다. 시간당 1만 원으로 계산해서, 하루에 5시간씩 20일 일하면 1백만 원이 나온다. 이런 프리터가 일본에서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얼마 전 신문에 충북 청주에 사는 프리터 한 분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커피 전문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로 버는 50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 월세와 관리비로 22만 원, 휴대폰비와 교통비로 10만 원, 나머지는 식비..

참살이의꿈 2019.02.24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골목에서 아이들 옹기종기 땅따먹기하고 있다 배고픈 것도 잊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영수야,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 흙 묻은 손 털며 일어난다 애써 따놓은 많은 땅 아쉬워 뒤돌아보며 아이는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 다시 둘러앉아 왁자지껄 논다 땅거미의 푸른 손바닥이 골목을 온통 덮은 즈음 아이들은 하나둘 부르는 소리 따라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 맞대고 놀고 부르시면, 어느 날 나도 가야 하리 아쉬워 뒤돌아보리 -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땅따먹기 놀이는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욕심을 적당히 제어할 줄도 알아야 한다. 힘과 근력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니 나한테는 잘 맞았다. 승률도 꽤 높았을 것이다. 놀이에 빠지면 집에 들어갈 시간도 잊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집집마다 아이 부르는 소리로 골목..

시읽는기쁨 2018.08.14

밴댕이 / 함민복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고 사셨으니 자, 인사드려야지 이분이 우리 선생님이셔 - 밴댕이 / 함민복 '밴댕이 소갈머리'임을 자인한다. 누가 지적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찔려서 하는 말이다. 늙어갈수록 밴댕이 소갈머리를 닮아간다. 제발 나잇값을 하며 살고 싶다. 우리는 땅의 밴댕이들이 아닌가. 도시는 거대한 밴댕이 양식장 같다. 얼마나 더 작아질 수 있을까, 바글거리며 살아간다. 그런 소갈머리로 거친 세상을 헤치고 버텨낸다. 어찌 보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한 거지. 밴댕이는 나이를 먹어도 밴댕이일 뿐. 그걸 인정하면 크게 안달할 일도 없는 거지. 팥알만 한 속으로도 바다를 이해하며 살 수 있다고, 우리 선생님이 보여주고 있잖아.

시읽는기쁨 2018.08.09

장마 / 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 장마 / 안상학 "사는 게 다 그래." 나만 힘들다 여겨질 때 가끔 되뇌는 말이다. 나에게만 집중하면 세상의 무게를 혼자 다 뒤집어쓴 것 같지만, 이웃으로 시선을 넓히면 사람살이가 다 비슷하다는 걸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다. 외..

시읽는기쁨 2018.07.09

그럭저럭

사람들이 안부를 물을 때 내가 잘 하는 말이 '그럭저럭'이다. 어쩌다 한 번 쓴 뒤로 지금은 입에 붙어 버렸다. "잘 지내?" "그럭저럭 지내지 뭐." '그럭저럭'은 '큰 문제나 잘된 일이 없이 그런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큰 문제도 없고 잘되는 일도 없다는 말이다. 요사이 내 생활이 말 그대로 그럭저럭이다. 상대방은 어떻게 알아들을지 모르지만, '그럭저럭'은 무색무취해서 마음에 든다. '그럭저럭'은 양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험한 세상에서 무탈하다는 것은 잘 지낸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된다. 자랑할 일도 비난받을 일도 없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행복하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만족하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다른 면으로 '그럭저럭'에는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이 묻어 있다. 잘되는 ..

참살이의꿈 2018.05.23

액땜

근심 걱정 없는 집이 있을까, 어디를 둘러봐도 일가일우(一家一憂)다. 어느 집이나 한 가지 이상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 팔자 편해 보이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 내는 게 인간이다. 가끔 '근심이 없는 십오초'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면 무슨 재앙의 전조가 아닌지 두려워진다. 차라리 자잘한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게 마음 편하다. 작은 근심은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큰 근심의 액땜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 속담이던가, 집안이 잘 나갈 때는 대문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지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조심하고 근신하며 지내야 한다는 뜻이리라. 도 이렇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

참살이의꿈 2018.02.07

산다 / 다나카와 슌타로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 재채기를 하는 것 당신 손을 잡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미니스커트 그것은 플라네타리움 그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그것은 피카소 그것은 알프스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만나는 것 그리고 숨겨진 악을 주의 깊게 거부하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울 수 있다는 것 웃을 수 있다는 것 화낼 수 있다는 것 자유라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지금 멀리서 개가 짖는다는 것 지금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 지금 어딘가에서 병사가 상처 입는다는 것 지금 그네가 흔들리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는 것 살아 있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시읽는기쁨 2017.08.25

내가 만약 / 디킨슨

내가 만약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괴로움 달래줄 수 있다면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 내가 만약 / 디킨슨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e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r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onto his nest, I shall not live in vain. - If I can / Emilly Dickinson 은둔과 고독의 삶을 택한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한다. 까마귀 떼를 떠나 백로 한 ..

시읽는기쁨 2016.11.21

모르고 지낼 권리

주민끼리 인사를 금지하는 규칙을 정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며칠 전에 있었다. 그것도 일본의 아파트 단지에서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닌가, 내 눈을 의심했다. 친절하며 인사성 밝기로 유명한 일본인이라 더욱 그랬다. 이 아파트 단지 주민을 대상으로 "이웃과 마주칠 때 인사를 나누고 있나?"라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매번 인사한다"고 답한 사람은 22%, "가끔 인사한다"는 50%, "거의 하지 않는다"는 28%로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마 더 심할 것이다. 엘리베이터와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는 가끔 목례를 하지만,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인사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파트 생활의 장점으로 익명성을 든다. 서로를 알 필요가 없고, 각자의 생활에 간섭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참살이의꿈 2016.11.18

작은 집을 권하다

나에게 남은 바람이 있다면 조용한 터에 자그마한 집 하나 갖고 싶은 것이다.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피신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마음이 답답한 때는 그곳에 찾아가 며칠 푹 쉬었다 오고 싶다. 책을 한 보따리 들고 가서 오직 글자 속에 묻혀 지내고도 싶다. 다카무라 토모야 씨가 쓴 는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아가는 여섯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생각 같은 세컨드 하우스 개념이 아니라 실제 거주하는 집이다. 집 크기는 대체로 세 평 안팎이다. 극단적으로 작은 집이다. 작은 집은 작고 소박한 라이프 스티일을 지향한다. 세 평 짜리 집에 산다는 건 종교적인 신념에 가까운 의지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스몰 하우스 운동'에 뛰어든 이들은 대부분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

읽고본느낌 2016.11.10

그림 / 신경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맨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 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 / 신경림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그림 속 사람이 현실로 튀어나왔다 들어가곤 하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이런 건 판타지 영화에서 잘 써먹는 수법이다. '타임머신'이라는 이름 때문에..

시읽는기쁨 2016.10.03

삶은 홀수다

김별아 작가의 산문집이다.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모은 것이라 시사성이 짙은 내용이 많다. 글마다 후기가 붙어 있는 게 특이하다. 현재 시점에서 본인의 느낌을 재정리했는데, 작가의 글에 대한 책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 작가의 인간적 특징은 산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의 일상이나 관심사, 가치관이 직설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소설 등의 작품을 통해서는 작가에 대한 내적 정보를 얻기 힘들다. 그러므로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문을 읽는 것이 필수다. 김별아 작가의 인간적 매력도 이 산문집을 통해 넉넉히 확인할 수 있다. 에서는 반짝이는 우리말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 소설가라 어휘력이 풍부한 건 당연하겠지만 적재적소에 배치된 우리말이 문장을 더 빛나게 한다. 새로운 단어를 여럿 알게 되었다. 써..

읽고본느낌 2016.09.23

목표 지향의 삶

근대화가 한창일 때는 목표 지향의 삶이 찬양받았다. 국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지도자가 군인 출신이어선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지배한 시대였다. 그때는 개인의 삶도 비슷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그래서 놀라운 성과를 이룬 건 사실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쟁 중심의 피로사회는 그 시절이 남긴 쓴 유산이다. 아직도 6, 70년대의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몸은 어른으로 성장했는데 아직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있는 꼴이다. 목표를 중시하는 결과주의 사회는 자아 실현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집단주의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집단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독재의 온상이면서 개인적으로는 불행의 씨앗이다. 목표를 중시하게 되..

참살이의꿈 2016.06.13

시시하다

시시포스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큰 바위를 죽을 힘을 다해 산 정상까지 올려놓으면 바위는 저절로 산밑으로 굴러내린다. 그러면 다시 꼭대기까지 밀어올려야 한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영원한 형벌이다. 시시포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통과 절망 속에서 비탄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시시포스는 아마 인생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아챌 때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인생을 장밋빛으로 낙관할 때 고통은 고통이 된다. 삶의 부조리와 정면으로 대면할 때 살아낼 힘이 생긴다. 시시포스의 힘이다. '시시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단한 데가 없어서 보잘것없다'로 나와 있다. 그렇다. 인생을 시시하다고 보는 데서 시시포스의 힘이 생긴..

참살이의꿈 2016.03.14

재미와 의미

재미와 의미, 둘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로 인생관이 달라진다. 한쪽 극단에 쾌락주의가 있고, 다른 쪽 극단에 금욕주의가 있다. 한쪽에서는 인생은 재미가 우선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어떤 즐거움도 의미가 없으면 헛것이라고 말한다. 재미가 있으면서 동시에 의미도 있는 일이라면 금상첨화다. 불행하게도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은 둘 중 하나만 갖추어져도 만족한다. 최악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이다. 죽지 못해 산다는 한탄이 나오는 경우다. 그러나 살면서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거리는 많이 있다. 힘들게 일해도 돈 버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풍찬노숙을 할지라도 이 세상을 위해 고귀한 일을 한다는 자부할 수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중간지대 어디쯤에서 살아간다...

참살이의꿈 2016.02.26

사는 게 뭐라고

지난달에 를 읽고 감동해서 다시 찾아 읽은 같은 작가의 책이다. 지은이가 60대에 쓴 일기 형식의 산문집으로 사노 요코 씨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일본인답지 않게 사고의 스케일이 크고 솔직 담백한 점이 좋다. 이 책에는 한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항암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쉴 때 지은이는 욘사마의 '겨울연가'를 시작으로 한국 드라마에 푹 빠졌다. 한쪽으로 누워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턱이 어긋나기도 했다. 친구와 남이섬에 찾아오기도 한 한류 팬이었다. 일본 아줌마가 왜 한국 드라마에 열광하는지 궁금했는데 사노 요코 씨를 보며 약간이나마 이해가 된다. 지은이는 한류 열풍의 원인을 '허구의 화사함'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종일 TV를 틀어놓고 사는 작가는 드물 것이다. 대개는 TV나 오락 프로를 멀리하려..

읽고본느낌 2016.02.17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 아름다운 얼굴 / 맹문재 고운 우리말 하나를 배웠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윤슬'이라고 한다. '물비늘'과 비슷하지만 '윤슬'이 좀 더 신비하고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

시읽는기쁨 2016.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