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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함께

사람살이는 ‘나대로’와 ‘함께’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살아가는 과정이다. ‘나대로’를 강조하다 보면 세상과 불화하기 쉽고, ‘함께’에만 매몰되면 자신을 잃어버리고 공허해진다. 좋은 삶이란 자신의 성향에 맞는 둘 사이의 황금비율을 찾아 사는 삶이다. 사람은 성격이나 가치관에 따라 ‘나대로’에 제일가치를 두기도 하고 ‘함께’를 우선시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래도 전자에 속하는 편이다. 그동안 ‘나대로’의 삶을 찾아 열심히 탐구하고 헤매었다. 그러다가 ‘함께’를 무시해서 쓴맛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혼자의 세계로 도망갔지만 인간관계를 무시한 내 식대로는 도리어 고통이었다. 인간은 로빈슨 크루소나 독불장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실패의 교훈이었다. 그래도 성격은 어쩔 수 없는지 지금도 항상 세상에서의 일탈을 꿈꾸고 ..

참살이의꿈 2010.11.23

버텨내기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기분이다. 요사이 사는 게 그렇다.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지금처럼 밍밍한 적도 없었다. 아니, 밍밍한 정도가 아니라 지겹고 싫다. 누구 말대로 수업종이 울리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늙은 소의 심정이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 두고 싶다. 왜 이렇게 되었나?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인 탓인가? 예전에 내가 군대생활 할 때는 제대 몇 개월 전부터는 일과에서 열외가 되는 게 관례였다. 군기가 빠진 정신 상태로 훈련을 받다가는 사고를 일으키기 십상이니 예방 차원도 있는 셈이었다. 군대건 사회건 마지막이 되면 일에 열정이 사라지는 건 공통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건 사람에 따라 다르기고 하다. 작년에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한 분은 나가는 날까지 자리를 지키며 열..

참살이의꿈 2010.05.26

한가하고 심심하게

아마도 올해가 직장 생활을 하는 마지막 해가 될 것 같다. 늘 바라왔던 일이지만 막상 끝이라고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직업이나 일에 대한 애착과는 다른 종류의 아쉬움이다. 그 어떤 것이든 인생의 한 매듭을 통과하는 것은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새로운 삶에 적응하고 배우는 과정은 이제 시작되었다. 우선은 한가하고 심심한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슨 일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솔직히 대답하면 반론이 워낙 거세 늘 변명하기에 바빴다. 퇴직을 해도 뚜렷하게 할 일은 없다. 이만큼 살았으니 이젠 일에서 해방되고 싶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며 살겠냐고? 물론 나에게도 어렴풋한 생각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건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절에 들어가면 속(俗)이..

참살이의꿈 2010.03.03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에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사는 이유 / 최영미 다시 핸드폰의 알람을 ON 시킨다. 30여 년 동안이나 젖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틀 속으로들어간다. 낡고 진부한 삶의 겉옷을 걸친다. "행복한 줄 알아요. 아무도 불러주는 데가 ..

시읽는기쁨 2010.03.02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 바보 이력서 / 임보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이력서란 걸 거의 써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동으로 취직이 되었고, 그 뒤로는..

시읽는기쁨 2010.01.3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힘든 일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오늘이 슬프다 해도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것은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옛날 이발소에는 돼지 그림에 이 시의 첫 구절이 적힌 액자가 의례 걸려 있었다. 우리 세대라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시가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글귀가 러시아 시인이 쓴 유명한 시의 한 부분인 줄 전혀 몰랐다. 푸슈킨이라는 이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십대 때는 이 시가 왠지 싫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싼 위로를 준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고뇌하던 시기, 그런 가..

시읽는기쁨 2009.12.05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올 여름에는 여러 편의 공포영화를 보며 집에서 지냈다. 공포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지만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

시읽는기쁨 2009.08.20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용혜원

그대에게 기억하고 싶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있습니까 그 그리움 때문에 삶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 용기가 나고 힘이 생기는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용혜원 집에서 놀다보니 아침에 방송되는 KBS TV의 '아침마당'을 가끔 보게 된다. 어제는용혜원 시인이 출연해서 삶에 대한 강의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용혜원 시인은 사랑에 관한 감미로운 시를 쓰시는 분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본인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 그분의 시를 접하면서 시인은 어떤 분이실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를 통해서 연상되었던 이미지와 실제의 모습이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여성적일 줄 알았는데 전혀 딴 판이었던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07.24

누가 밀었어

옛날에 어느 나라의 왕이 하나뿐인 딸에게 좋은 배필을 구해주길 원했다. 딸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만큼 용기와 패기 있는 청년을 구하기 위해서 왕은 방을 내걸었다. "누구든지 0월 0일 시합에 나와 이기는 사람에게 내 딸을 주고 사위로 삼겠다!" 구름처럼 몰려든 청년들 앞에 주어진 시합의 내용은 악어가 가득찬 호수를 헤엄쳐 건너갔다 오는 것이었다. 아무도 감히 뛰어들 엄두를 못 내고 그저 물끄러미 호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한 쪽에서 첨벙하는 소리가 났다. 한 용감무쌍한 청년이 물에 뛰어 든 것이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호수 반대편을 향해 헤엄쳐 갔고 무사히 돌아왔다. 모두의 박수갈채와 환호를 한몸에 받으며 물 위로 올라온 이 청년에게 왕은 다가가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려 했다. ..

참살이의꿈 2008.01.02

망가지고 싶은 충동

소주 몇 잔 걸치고 나면 내 사는 모습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좀 험하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외유내강형의 선비 스타일이라고 한다. 내 자신은 거기에 대해 동의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대체로 그런 쪽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비라는 것은 좋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는 완고하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 한다. 말수도 적고 붙임성도 없으니 부담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얼마 전 동료 P가 전날 코 빠지게 술 마신 얘기를 하며 "너도 이렇게 망가지고 싶지?"라며 내 마음을 들여다 보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본심이 탄로난 것 같아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다...

길위의단상 2007.06.07

삶의 전환기에서

살다 보면 인생에도 매듭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인생 역시 비연속적인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개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런 매듭을 분별해 내지만 어떤 때는 인생의 흐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채기도 한다. 특히 한 매듭에서 다음 매듭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사람은 지나온 삶과 현재를 비교하며뭔가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예감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변화란 새로움과 성숙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두려움과 불안의 원인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의 전환기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내적 갈등이다. 기존의 삶의 태도를 수정한다는 것은 한 세계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내용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번민과 고통을 수반한다. 새로 얻게 될 것의 의미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던 기..

참살이의꿈 2007.03.25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몸은 맥이 빠지고, 마음은 천근이나 되는 양 무겁다. 거대한 장벽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 꼼짝도 못한다. 몸부림을 쳐보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악몽이 낮의 생활로 연결된다. 가치있다고 믿었던 삶이 무너지고 다시 혼돈 속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시읽는기쁨 2007.03.11

차가운 계절

며칠 전에 중부지방에 함박눈이 내렸다. 수원은 25 년만의 대설이었다고 한다. 한 순간에 나타나서 황홀케 했던 하얀 설국도 이틀이 지나니 자취를 감추었다. 홀연히 피어난 겨울나무의 설화도 이젠 다 사라졌다. 눈 온 다음 날 친구와 같이 경복궁을 걸었다. 이 친구는 30 년 지기다.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직장에 놀러갔다가 처음 이 친구를 만났다. 그 뒤 2 년 정도 같이 근무했지만 가까운 관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겨울에는 같이 도봉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포대능선에서 눈에 미끄러졌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잡아주어서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걸 막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친구는 늘 자기가 생명의 은인이라며 잘 모시라면서 부담을 준다. 그때 재미있었던 것은 몸에 갑자기 브..

사진속일상 2006.12.22

시인은 / 이한직

한 눈을 가리고 세상을 간다 하나만 가지라고 구슬 두 개를 보이던 사람에겐 옥돌 빛만 칭찬하고 돌아서 왔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빙그레 웃어만 보이련다 남루(襤樓)를 감고 거리에 서서 마음은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라 - 시인은 / 이한직 시처럼, 시인처럼 살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시인의 삶이란 첫째,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어야 한다. 그는 구슬을 보고도 돌아설 줄 안다. 고로 시인은 가난하다. 그래도 시인의 마음은 너그럽고 고요하다. 빙그레 웃을 줄 아는 여유가 있다. 둘째는, 순수한 감성을 가져야 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한 눈을 감은 대신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선각자적 예지를 지녔다. 시인이 늘 자신이 쓴 시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

시읽는기쁨 2006.12.07

푸른 광장을 꿈꾸는 사람들

최인훈의 ‘광장’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 땅 위에 사람들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 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참살이의꿈 2006.11.09

산다는 것 / 배현순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 산다는 것 / 배현순 산다는 게 뭔지 나는 몰라요. 뭔가 보물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 같기도 하고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 헛일 같기도 하고 경쾌한 행진곡 같기도 하고, 음울한 장송곡 같기도 하고 짖궂게 짜여진 각본 같기도 하고, 우연..

시읽는기쁨 2006.08.23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비에도 지지 않고..

시읽는기쁨 2006.08.11

오늘의 노래 / 이희중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 오늘의 노래 / 이희중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나의 기쁨..

시읽는기쁨 2006.05.09

하여간 / 장철문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라 어떨진 모르겠는데, 하여간 청어(靑魚)라는 물고기가 있다는데, 하여간 그게 횟감으로는 참 끝내준다는데, 하여간 그놈 성질이 하도 급한 나머지 배 위로 올라오자마자 목숨을 탁 놓아버리는 바람에 그 착 감기는 살맛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인데, 하여간 어느 코쟁이 나라의 좀 똘망똘망한 어부가 어찌하면 이걸 산 채로 도시에 가져가서 팔아먹을 수 있을까 밤낮으로 짱돌을 굴리다가 아하, 그렇지! 그럴싸한 수를 한가지 냈다는 것인데, 하여간 큼지막한 어항을 하나 만들어설라무네 거기 바다메기를 두어 마리 풀어놓고는 청어란 놈을 잡아 올리는 족족 어항에 집어넣어서는 득달같이 도시로 내달았다는 것인데, 하여간 청어란 놈은 바다메기한테 잡아먹힐까봐 어항 속에서 뺑뺑이를 도느라고 미처 죽을 새가..

시읽는기쁨 2006.04.14

일십백천만 구구팔팔이삼사

며칠 전 모임에서 한 분이 재미있는 말을 소개해 주었다. 사람이 나이들어 가면서'일십백천만'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어 했다. 마침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걸 그림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기에 퍼와봤다. 또 '구구팔팔'이라는 말은 들어보았는데 요사이는 뒤에'이삼사'가 붙는다고 한다. 그 설명을 들으니 실소가 나왔다. 어쩌면 욕심이 너무 지나친 것 같기도 하고..... 일 - 우리 하루 한가지 이상 좋은일 하고 살아야겠지요. 십 - 최소한 하루 열사람 이상 만나 정을 나누고 백 - 하루 백자는쓰고 천 - 천자 정도는 읽고 (신문만 읽어도..) 만 - 하루 최소한 만보는 걸으며 살아야지요. 이렇게 살다보면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수있답니다. 2- 이틀 정도 앓다가 3- 사..

길위의단상 2006.03.30

자성(自省)

따스한 봄날도 어떤 때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황사가 몰려오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고요한 바다도 늘 물결이 일고 있다. 어떤 날은 큰 바람이 불어 세찬 파도가 일기도 한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쉽고 편안하게만 사는 집이 어디 있으랴. 바깥 일은 논외로 하더라도 가정 안에서도 부모-자식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물결을 일으킨다. 어떤 것은 잔물결로 그치기도 하지만, 때로는쓰나미가 되어 집안을 휩쓸어 버린다. 곱게 차려입고 화사한 웃음을 짓는 저 사람들의 표정 뒤에도 남모를 고통의 그늘이 서려있음이 보인다. 겉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그대로가 그 사람의 진면목은아닌 것이다. 사람들의 이면에서 이런 고(苦)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때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이 느껴진다...

길위의단상 2006.01.22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하느님 이 눈을 후벼 빼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볼 겁니다 이 고막을 뚫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들을 겁니다 이 코를 틀어막아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숨을 쉴 겁니다 이 입을 봉해 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소리칠 겁니다 단칼에 이 목을 날려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당신 생각을 할 겁니다 도끼로 이 손목을 찍어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풍물을 울릴겁니다 창을 들어 이 심장을 찔러보시라구요 난 발바닥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사랑을 할 겁니다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발바닥에 불질러보시라구요 젠장 난 발바닥 자죽만으로 남아 길가의 풀포기들하고나 사랑을 속삭일 겁니다 - 난 발바닥으로 / 문익환 늦봄 문익환 목사님(1918-1994). 목사님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셨다.목사님은 장준하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 운..

시읽는기쁨 2005.11.11

사는게 그런 거지

형제간의 우애도 어릴 적 얘기인가 보다. 철 없던 시절에는 같이 웃고, 뒹굴고 싸우고, 그러다가 금방 화해하고 세상에 둘도 없이 가까운 사이였지만 크고 나면 어떤 때는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서로간에 너무 기대가 커서일까,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특히 형제간에는 돈 문제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다. 돈 한 푼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의 정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기 일쑤다. 웬수가 되는 것이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고이 키워놓아도 다 크고 나면 잘 난 것은 제 탓, 못 난 것은 부모 탓이다. 그래도 부모-자식 사이의 핏줄은 어짜할 수 없다고 아무리 애물단지지만 그래도 내 자식이 아파하랴 부모는 늘 노심초사다. 우리 집안만 그럴까 하고 심각하게 ..

길위의단상 2005.09.05

후회하면 안 돼!

서울을 떠나 시골로 거처를 옮긴 후배와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는 탈서울한지 벌써 5년이 되니 이젠 안정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집에 가 보아도 모든 것이 틀이 잡혀 있어 부러울 때가 많다. 나무들도 언제 그렇게 컸는지 처음 심었을 때는 보잘 것이 없었는데 이젠 집을 가릴 정도의 탐스런 나무로 자라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진 전원 주택이지만 그만큼 가꾸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들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후배가 자리잡은 곳은 마석에 있는 전원 주택 단지이다. 20필지 정도의 규모로 업자가 개발해 놓은 것인데 땅을 구입해서 집을 지어 입주했다. 대부분 외지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단지에 들어가는 것이 원주민들의 텃세나 생소한 환경..

참살이의꿈 2004.08.22

산다는게 뭔지

"산다는게 뭔지....."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에 나갔을 때 이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분이 계셨다.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언제나 넋두리 비슷한 독백으로 말하곤 했다. 그 어투가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모두들 그 말을 들으면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그 분의 별명이 곧 `산다는게 뭔지`였다. 똑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 식상하기도 하련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듣는 소리인데도 그 분의 독백에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경박하지 않은 진지한 그 분의 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할 때 그 분의 주름진 얼굴에는쓸쓸함이랄까 우울함이랄까 뭔지 모를 묘한 분위기가 번져 나왔다. 그말에 누구도 결코 농담으로 대꾸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독백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철학적 질문같기..

길위의단상 2004.04.01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맑은 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흐린 날이 더 많다. 바람 불고 비 내리고 어느 때는 폭풍우를 만나기도 한다. 우산도 준비하지 않아 궂은 비를 흠뻑 맞기도 한다. 인생길이 탄탄대로이지는 않다. 도리어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자갈길일 경우가 많다. 어느 때는 튀어 나온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정갱이에서는 피가 날지도 모른다. 앞에 가로놓인 벽이 너무 단단하고 높아서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살이가 어찌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랴마는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며 운명이 야속해질 때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분명 불평등이다. 어느 하루살이는 맑은 날 이 세상에 나와 창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제 몫을 다하지만, 어느 하루살이는 장마철에 이 세상에 나와 비에 젖은 날개는 찢어지고 무너져 ..

길위의단상 200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