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푸른 광장을 꿈꾸는 사람들

샌. 2006. 11. 9. 12:03

최인훈의 ‘광장’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 땅 위에 사람들이 살기 비롯한 것도 오래 되거니와, 앞으로도 사람은 오래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는 누구나,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저마다 짐작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짐작이 얼마쯤 뚜렷한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도 있다. 사람은 초목이나 짐승과는 달라서, 이 짐작이라는 것을 나면서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에 저편에서 가르쳐주고, 제가 깨달아간다는 것이 삶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 삶의 짐작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고, 혼자 힘으로 깨닫기는, 혼자서 태어나기가 어려운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라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허둥지둥하게 된다. 짐작이 안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이 없어져버리거나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대로 세상은 버티고 있다.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짐작을 가지고 살고 있건 아니건, 아랑곳없다. 그럴 때 사람은 산다느니보다 목숨을 이어간다는 말이 옳겠다. 다시 말하면, 초목이나 짐승처럼, 알지 못하는 힘에 밀려서 때와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 삶을 탐탁치 못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짐작을 알아내보려고 애를 쓴다. 머릿속에 있는 골이라는 기관을 짜본다든지, 몸을 놀려본다든지 한다. 그러나, 골을 짠다든지, 몸을 놀렸을 때 그들은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에 부딪히기가 일쑤다. 울타리 너머를 기웃거리거나 하려 들면 대뜸 몸을 다치게 된다.

여기서 주저앉아버리면, 그 사람은, 산다는 일을 무언가 신비한 도깨비 놀음으로 알게 된다. 무서운 낭떠러지 언저리 따위에는 얼씬도 않으려 들고, 눈이고, 발에 익은 골목만 골라 다니면서 하다못해 푸근한 인정이나마 놓치지 말자고 든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짐작이 들었노라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거의 모두, 그들의 짐작이라는 것은, 함부로 버리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그런 짐작이다. 버린 것 - 그것은 무엇일까? 귀한 어떤 것이다. 버리기 어려운, 버려서는 안 될 어떤 것이다. 그것을 잃지 말자는 마음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그 짐작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선뜻 몸과 마음을 내키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


물론 이 말은 소설 주인공인 명준에 대한 설명이다.

좌절한 이상주의자 명준의 비극은 마음 아프다. 그것은 모든 이상주의자들이 겪는 슬픔이고 아픔이다. 영악한 현실주의자들은 별 고민도 없이 잘 산다. 반면에 삶의 의미를 묻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이상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과의 마찰이다. 명준은 육친에, 애인에, 이데올로기에 버림 받았다. 그런 고통의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현실과 영합하든지, 그도 안 되면 명준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나약한 이상주의자로 불릴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한 사람이다.


6.25 사변 전후가 시대 배경인 소설에서 명준의 고민은 지금 이 시대에도 아직 유효하다.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싸움은 계속 진행형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양쪽 사회는 달라진 게 없다. 명준이 본대로 남쪽은 실존하지 않는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광장이고, 북쪽은 광신도들이 모인 광장이다. 그 어디도 푸른 광장이 아니다. 한반도를 넘어 유토피아를 찾는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런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방황하는 명준의 모습에서 나는 내 자신을 본다. 그의 잘못은 이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조급하게 달성하려는 것에 있는지 모른다. 역사는 소걸음으로 진보한다. 어느 한 사람의 혁명가에 의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이상주의자는 끊임없이 세상과의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는 희생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명준도 그 중의 하나다. 토마스 모아식 유토피아가 옳은지, 베이컨식 유토피아가 옳은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길이 있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바다에 뛰어들기 전 명준이 한 쌍의 갈매기를 보며 그가 어떤 푸른 광장을 찾았는지는 몰라도 괜찮다. 그가 깨달은 것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간 것만은 분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작은 봉우리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고뇌를 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현실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이다. 명준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비장해 보인다.


어떤 점에서 명준은 세상과 현실에 진 사람이다. 그는 푸른 광장을 그리는 자신의 꿈 때문에 쓰러진 사람이다. 그러나 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진다. 인생의 가치는 졌느냐, 지지 않았느냐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천하게 지느냐, 얼마나 갸륵하게 지느냐에 인생의 갈림길이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