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우리 현실과 희망의 대안

샌. 2006. 10. 27. 09:06

교양강좌의 마지막 시간은 고려대 강수돌 선생님의 ‘우리 현실과 희망의 대안’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들었다. 강 선생님은 시골 마을에서 생태적 삶을 몸으로 실천하고 계시는 분이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돈의 학문 대신 삶의 학문을, 죽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실천을 추구하시는 분이다. 그래선지 강의 내용이 살아서 감명 깊게 전달되었다. 특히 그분의 온화한 말투, 평화스런 얼굴은 그분의 실제 삶이 어떠한지를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강의 내용을정리해 보았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체제란 어떤 것이며, 그 체제 하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가정과 학교, 직장으로 나누어서 진단해 본다.


자본주의란 쉽게 말해 돈 놓고 돈 따먹는 경쟁의 체제다. 피라미드와 같은 계층화된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구성원들은 경쟁을 통해 위의 단계로 올라가려고 애쓴다. 그리고 위의 계층이 누리는 기득권은 아래 계층의 희생에 기초한다. 내가 누리는 풍요는 본질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몫을 뺏어온 것이다. 부자는 빈자의 몫을, 강대국은 약소국 노동자의 희생을, 그런 문명은 자연의 파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다리 구조는 근본적으로 반생명적이며 허망한 구조다.


가정에서 아기의 탄생을 ‘사랑의 결실’이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체제는 ‘제 2세대 노동력’이라 이름 짓는다.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삭막한 이름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것은 체제만이 아니라 부모들조차 그런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일류 대학, 일류 직장의 바람은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사실은 그 구체적 내용이 아이들로 하여금 ‘제 2세대 노동력’으로서의 경쟁력을 지닌 존재가 되라고 소망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체제의 논리를 인간 주체가 무비판적으로, 또는 현실 조건들에 굴복해서 굳게 내면화 시킨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이렇게 되면 항상 자기 자식이 다른 아이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사다리 질서의 윗부분을 ‘더 빨리 더 높이’ 차지하기를 바라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타인을 사랑하기는커녕 경쟁상대로 여기고, 일등을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마저 억압하게 된다. 즉 자기 사랑 대신 자기 학대를 하게 된다.


문제는 각박한 현실이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들이 처한 현실 자체가 고달프기 때문이다. 인간사다리의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일수록 높은 자리로 오르는 것이 최고 관심사다. 자기는 못하더라도 자식만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려고 한다. 부모로서 의무가 그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기존 패러다임 속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부모들은 학교에 대해서조차 그런 관점에서 아이들을 훌륭한 고급 노동력으로 기르는가 하는 부분에 관심을 둔다.


현대의 가정은 대부분이 냉장고가 갖춰진 버스 정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구성원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소일 뿐 참의미에서 인간적 정과 관계가 교류되는 장소가 아니다. 서로 격려하고 내적 성장을 북돋워주는 기능은 사라졌다.


학교는 노동시장에 팔려 나갈 노동력이 체계적으로 육성되는 곳이다. 한마디로 쓸모 있는 노동력을 만드는 공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년의 교육기간동안 꿈과 소망을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 축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은 심대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파괴라고 할 수 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서 종종 듣는 이런 말이 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없어도 되는 사람, 그래서 세상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고 한다. 이 훈화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하나는 과연 누가 훌륭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산업전사(industrial soldier)다. 둘째는, 사람의 가치 평가를 내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획일화된 틀에 가둘 수 없다.


학교는 경쟁을 통한 성적과 점수 제일주의로 학생들에게 체계적으로 스트레스를 가한다. 그것은 공부를 잘 하는 아이나 못 하는 아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애국조회나 국기에 대한 맹세 등을 통해 배타적 민족주의나 획일적 국가주의를 무의식중에 심어준다. 완전히 타율적인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명칭도 거짓말 체계에 아이들을 익숙하게 만든다. 이런 비정상적인 학교 시스템은 인간의 DNA도 변화시켜 고용주가 필요로 하는 충직한 노동자를 만들어 낸다.


경쟁은 지배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타자를 누르기 위한 생존 경쟁, 세계시장을 둘러싼 상품 경쟁은 어떤 상품이 승리하는가와는 무관하게 자본주의 세계 체제를 존속시키는 조건이 된다. 내가 경쟁에 참여하는 순간 그 승패와는 무관하게 경쟁의 희생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시켜 주게 된다는 것,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아이들을 평가와 줄 세우기로 학교에서부터 경쟁에 익숙하게 만들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하수인이 되게 한다.


이렇게 양성된 노동력이 마침내 취업을 하게 되면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 이상으로 비참하다. ‘경제적 공포’를 쓴 포레스테의 말대로 ‘착취당하고 싶어도 착취당할 기회조차 잃은’ 사람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실정이다. 그나마 취직을 한 사람들은 또다시 성과주의, 생산성주의, 경쟁력주의의 패러다임에 갇힌 채 살아가야 한다. 자본주의 경쟁 체제가 이런 것을 강제한다. 이런 것들을 주체적으로 거부할 의사가 없는 한, 그리하여 주어진 체제 속에서 더 높은 곳을 더 빨리 차지하려는 출세 패러다임을 가진 한, 이런 경쟁 체제는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모두에게 더욱 강제된다.


회사에 취직을 한 사람들은 ‘경쟁력(또는 일등)만이 살 길이며 생산성 향상만이 모두가 살 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더욱 내면화된다. 그러나 기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과정 중 80%는 파괴적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시간 연장, 인력 감축, 임금 삭감, 산재, 폐수 방출 등 부정적 행위가 수반된다. 이 속에서는 설사 임금, 지위, 복지 수준은 향상되더라도 진정한 삶의 질과 참된 행복은 망가지게 된다.

이렇게 한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정년 이후에는 자아상실감이나 허탈감 속에 방황하기 일쑤다. 젊었을 때 찾아야 했던 행복을 이제 한꺼번에 찾을 수는 없다. 은행 이자와 달리 우리의 행복은 삶의 매순간마다 찾으며 느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80 평생의 고생스런 역경 끝에 남은 것은, 자신이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훌륭한 노동력이 되도록) 학교 공부 하나 시켜냈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보통 사람들의 삶이자 대중들의 삶이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 우리가 쉼 없이 내몰리고 있는 것은 부자 되기에 대한 강박증이다. 모든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고, 그래서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일류대학 강박증도 사실은 부자 강박증과 연관되어 있다. 세상이 헛돈다고 비판하면서도 현실이 돈 중심으로 돌아가니 너나 할 것 없이 돈 중심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데도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커지고 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왜 열심히 살아도 빈부 격차가 자꾸 벌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고르고 건강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지금의 교육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물론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도 도움이 될 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빠져 있다. 부자 되기 교육은 나쁘게 보면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 없이 무조건 자기만 부자 되면 된다는 이기적 인간으로 육성하자는 말과 같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모두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세상이 더 각박해진다. 또한 부자가 되는 사람은 현재의 삶의 구조상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소수의 승자는 대다수 패자를 밟고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나가게 되면 행복해진다는 방법론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럴수록 행복감이 높아지기 보다는 스트레스가 높아진다. 그것은 기존 방법론에 두 가지 맹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모두가 사다리를 올라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지만, 모든 사람이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는 없다. 사다리 위나 아래나 중간이나 나름대로 모두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둘째, 사다리 위쪽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 실제로는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자신을 강제, 억압해야 한다. 또 그 기득권의 엄청난 파이는 사다리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 갖지 못한 만큼 희생당한 희생물에 근거하고 있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이 두 가지 한계로 인해 사다리 질서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패러다임은 근원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사다리 질서를 원탁형 질서로 바꾸어야 한다. 원탁형 질서에서는 돈이나 지위가 아닌 개성과 잠재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한다. 무슨 일을 하든 경제적으로는 비슷한 대우가 돌아가야 한다. 경쟁이 아닌 협동과 조화의 원리가 사회를 이끌어간다.

또한 삶의 양 보다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 돈, 권력, 지위, 명예를 추구하기 보다는 기본적인 의식주에 만족하면서 마음의 건강, 여유, 인격과 평등, 공동체, 생태계 같은 가치를 우선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과지향이 아니라 과정지향이다.

우리의 머릿속에서부터 대안의 밑그림을 확실히 그리면서 나부터 실천을 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고, 그 공간을 확장하고, 그 울림을 더 크게 늘려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삶의 목적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운동은 그 과정에서도 즐겁고 행복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바람직한 삶에서 행복은 삶의 목적이자 과정이다.


더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는, 우선 가정에서는 일류주의에 대한 강박증 버리기, 조급증 버리기, 옆집 아줌마 조심하기(아무리 좋은 얘기를 듣고 결심을 하더라도 옆집 아줌마의 현실적인 말에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아이와 함께 행복한 삶의 조건을 찾아보기(자신이 하고 싶은 일 + 잘 할 수 있는 일 + 사회 행복에 이바지하는 일) 등이 있다.


학교에서는, 공장 같은 학교를 가정 같은 학교로 바꾸기, 학습과정을 맞춤형으로 새로 짜기, 자아발견과 자아실현의 기회 만들기, 자기 행복과 사회 행복을 조화하는 방안 탐색하기 등이 있다. 우선 공교육이 혁신되어야 한다. 대안학교의 교육활동이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공교육이 인가받은 대안학교 정도로 변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교육제도에 파열음을 내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직장에서는, 생산물의 사회적 의미를 다시 따지기,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을 의미 있고 보람 있게 바꾸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떠나거나 새로 만들기 등이 있다.


사회 전체로는 고교평준화와 대학평준화를 넘어 직업평준화 실현하기(개성 있는 평준화), 노동시간 단축(4시간 노동 + 4시간 활동 + 4시간 친교), 주거와 교육과 의료 부문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1차 산업 우선으로 경제 비중 바꾸기 등이 있다. 복지국가로 부르든 사회주의 국가로 부르든 주거와 교육과 의료 부문만은 국가에서 보장을 해주는 구조로 변해야 한다. 돈이 없어서 교육을 못 받고, 치료를 못 받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주거 보장만 이루어져도 우리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인가. 지금의 능력 위주의 사회 체제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제도다.


강의를 듣고 난 후 같이 간 동료들과 우스갯소리로 ‘제개모’(제대로 개기는 모임)를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자본주의를 깨는 방법은 사회 구성원이 노동자와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으로서 하나의 예가 스콧 니어링이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가장 비자본주의적으로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부의 편중과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고, 생태계 파괴는 가속화되고 있는 암담한 현실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결국 사람으로 돌아온다. 우리 각자가 잃어버린 본심(자연스런 내면)을 되찾고, 그에 바탕하여 삶의 과정은 물론 온갖 사회 제도들을 새롭게 짜는 것이다. 내일의 우리 사회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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