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선생의 아포리즘이다. 선생의 글에서 핵심 되는 부분을 모았기 때문에 선생의 생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하는 선생의 주장에는 동의되는 부분이 많다. 선생의 글은 간결하면서 주장이 선명하다. 인간 삶에 대한 통찰이 저변에 깔려 있다.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은 내적 음성과 대화하고 외적 음성과도 대화할 때 비로소 외롭지 않다. 우리,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건 대개 내적 음성과의 대화다.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러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선생의 정의에 따르면 고독은 홀로 있는 존재로서의 '당당함' 또는 '충만함'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고독사'라는 말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 많은 창작물이나 작품이 고독한 시간을 경유하며 만들어진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고독이라는 것,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이라는 선생의 말에 공감한다.
더는 사족을 달고 싶지 않고, 이 책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 나오는 반짝이는 대목을 옮긴다.
감촉에 익숙해지면 향기를 잊기 쉽다.
기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없다. 사람에겐 가진 소중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능력이 없다. 형식이 무엇이든 기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위험하거나 적어도 섣부르다.
개인이로든 인류로든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는 건 언제나 인간 자신이다. 우리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들인지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같이 한심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념이고 합리성이고 이전에 염치가 있고 자의식이 있어야 사람이다.
인간의 모습에서 겸손보다 더 품위 있는 건 없다.
멋지게 살 도리가 없는 세상에서 멋지게 살자고 말하는 건 얼마나 멋진가. 그 무모함은.
곤궁한 사람이 혹시 돈이 자신을 타락시킬까 걱정하는 풍경은 한심하지만, 아름답다.
우리가 못 한다 아쉬워하는 많은 것들도 실은 안 해도 그만인 것들.
하지 않아야 할 일은 반드시 하지 않는 게 좋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때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시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세상의 오른쪽에 보수 부모들이 있고, 왼쪽에 진보 부모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 아래에 가난한 부모들이 있다.
오늘 한국의 입시 장사가 부끄러운 장사인 건,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하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제도 교육이 사람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해주진 않는다. 다만 무지를 좀더 어려운 말로 표현할 수 있게는 해준다.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 따위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이다.
존중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지만, 존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순 없다.
우리는 종종, 아니 어쩌면 거의 언제나 '내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괴롭히고, '내 애인을 위하여' 애인을 괴롭히며, 급기야 '내 국민을 위하여' 국민을 괴롭힌다.
아이의 영혼은 느리고 의미 없는 시간에, 그윽하게 먼 산 보는 시간에 성장한다. 한국의 교육이란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할 시간을 1분 1초도 허용하지 않는 노력을 뜻한다.
한국에서 교회에 나간다는 건 신앙을 포기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회개란 교회에 안 나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게 아니라, '삶의 방향을 뒤집는 것'이다. 물질의 부와 영혼의 부는 한 사람 안에서 동거할 수 없다.
지배 체제와 불화하지 않으면서, 아무런 오해와 곤경에 처하지 않으면서, 이쪽에서도 칭찬받고 저쪽에서도 존경받으면서, 예수를 좇고 있다 말하는 건 가소로운 일이다. 그들은 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제 말을 할 뿐이다.
내 밖의 적과 싸우는 일이 혁명이라면, 내 안의 적과 싸우는 일이 바로 영성이다.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들 새로운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건 제 심리적 평온 뿐이다.
나눔은 적선이나 자선이 아니다. 적선과 자선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나눔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남은 걸 나누어주는 게 아니라 남보다 많이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우리가 미안해해야 할 아이가 있을 뿐.
스스로 해방된 자만이 싸울 수 있고 싸우는 자만이 해방될 수 있다.
억압에 순응하는 사람이 있기에 억압은 존재한다. 불의한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인민의 비굴과 무기력이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어디에나 진열되어 있지만 돈이 없으면 구매할 수 없는 상품이다.
자기 정당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유서 깊은 본능이다.
계급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계급이라는 말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계급에 속해 있다.
'국익'은 지배계급이 제 이익을 속여부르는 말이다.
노동자가 사람 대접받는 세상은 자본가가 비로소 사람 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더는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하지 않고 더는 누구도 마음 깊이 사랑하지 않을 때 영혼의 죽음을 맞는다. 상상과 사랑에 가차 없어야 한다.
역사에서 보듯, 청년들이 극우의 우물을 찾는 건 보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아는 것은 남의 생각을 받아들인 거고, 깨닫는 건 그걸 내 생각으로 만드는 것이다. 책을 읽는 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다.
진보란 기회를 가진 사람들이 기회에서 차단된 사람들과 함께 기회의 속도를 제어하며 기회의 정의를 구현해가는 행진 아닐까?
한국은 개인이 없는 집단을 공동체라 믿는 보수 아저씨들과 개인이 되지 못한 채 공동체주의자가 되어버린 진보 아저씨들이 망쳐버린 사회다. 필사적으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좋은 글은 불편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 아프다.
다른 생각을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가장 심각한 도박은 '주식'과 '부동산'이다.
영웅이 없는 게 문제일까 영웅만 기다리는 게 문제일까.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을 상대하지 않는 것'은 품위 있는 삶의 핵심 요소다.
전쟁이 사악한 것은 단지 대규모의 폭력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가장 공공연한 착취극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벌이는 놈과 치르는 놈이 따로 있다.
동물사랑은 동물의 삶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인간이 그들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데서 온다.
혁명도 해방도 구원도 결국 사랑의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