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가오는 것들

샌. 2019. 9. 8. 10:23

40대 중반쯤 되면 생의 전환기가 찾아오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주변 환경도 변한다. 이루고 성취하기보다 잃고 보내는 일이 늘어난다. 삶이 익숙해지는 대신 심드렁하다.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도전을 받으며 일에서도 변방으로 밀린다. 자식은 성인이 되어 더는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나탈리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재직하며 평범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주부다. 성실해 보이는 남편과 십대 후반의 아들, 딸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는다. 학교에서는 급진 사상을 가진 학생들과 갈등을 빚고, 출판사는 수익 문제로 책 출간을 거절한다. 성장한 자식은 나탈리에게서 멀어지고, 늘 딸에게 의지하려던 어머니도 세상을 뜬다. 이런 사건들이 순차적으로 다가온다.

'다가오는 것들'은 상실의 아픔을 평정심을 잃지 않은 채 버텨내 나가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나탈리는 동요를 겪지만 비틀거리지는 않는다. 성숙한 인간의 품위를 보여주는 영화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탈리의 내공이 그만큼 깊다는 뜻이다. 평소 나탈리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다. 철학 하기의 힘이 느껴진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그걸로 행복해." 제자에게 한 나탈리의 이 말에 그녀의 자긍심이 들어 있다. 남편과의 헤어짐이 슬프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고백도 한다.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철학을 살고 있음을 나탈리는 보여준다. 누구나 상실의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탈리는 떠나가는 것을 억지로 붙잡으려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남편의 이별 통보에 쿨하게 반응하던 나탈리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런 면에서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 차이도 커 보인다.

나탈리 역시 연약한 여자의 모습을 보인다. 혼자 침대에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제자 파비앵에게 의지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리를 확인하고 실망한다. "여자 나이 40이 넘으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퇴물이 된다." 나탈리답지 않은 이런 식의 말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중심이 굳건한 사람으로서 공부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나탈리는 잘 보여준다.

나탈리를 연기한 배우는 이자벨 위페르다. 무척 매력적이다. 지금 나이는 60대 후반인데 40대의 나탈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녀가 출연한 '해피 엔드'라는 영화가 있다. 꼭 봐야겠다. 또한 영화에 나오는 OST는 애잔하면서 감미롭다. 음악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다.

영화 마지막은 손주를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장면이다. 거실에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자식이 찾아와 있다. 떠나보내고 맞아들이며 삶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삶의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다. 지금껏처럼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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