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샌. 2018. 8. 14. 10:51

골목에서 아이들 옹기종기 땅따먹기하고 있다

배고픈 것도 잊고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영수야, 부르는 소리에 한 아이 흙 묻은 손 털며 일어난다

애써 따놓은 많은 땅 아쉬워 뒤돌아보며 아이는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 다시 둘러앉아 왁자지껄 논다

땅거미의 푸른 손바닥이 골목을 온통 덮은 즈음 아이들은 하나둘

부르는 소리 따라 돌아가고 남은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 맞대고 놀고

 

부르시면, 어느 날 나도 가야 하리

아쉬워 뒤돌아보리

 

-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땅따먹기 놀이는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욕심을 적당히 제어할 줄도 알아야 한다. 힘과 근력으로 하는 게임이 아니니 나한테는 잘 맞았다. 승률도 꽤 높았을 것이다. 놀이에 빠지면 집에 들어갈 시간도 잊는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집집마다 아이 부르는 소리로 골목은 부산해진다.

 

어른 살아가는 모습도 아이들 땅따먹기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평생 피 터지게 싸워 얻었지만 쓱쓱 문지르면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간다. 내 땅 네 땅은 잠깐 선으로 그려진 허구일 뿐이다. 그분이 부르시면 훌훌 털고 일어나야 하리라. 흙만 묻은 빈손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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