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의 거처 / 김선향

샌. 2018. 8. 2. 14:04

너는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빈집 절구독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붙박이별을 이정표 삼아 비탈길을 가는 나귀 걸음걸이다

 

너는 무명천에 물들인 쪽빛이다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후박나무 잎사귀다

 

- 나의 거처 / 김선향

 

 

꽃과 잎을 주목하지 줄기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나리꽃의 '줄기'다, 라는 독백에서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결연한 고독이 감지진다. 더구나 고산지대에 핀 말나리꽃의 줄기다. 다른 연이 주는 느낌도 비슷하다. 무욕(無欲) 하기에 당당하게 외로울 수 있다. 시인의 걸음에서는 묵향이 풍긴다. 제목은 '나'이지만 시에서는 '너'라고 한 것도 재미있다. '우리'의 거처는 마땅히 이래야 하리라는 은유 같다. 이런 집 한 채 짓고 살면 어떤 호화 저택이 부러우랴.

 

김선향 시인이 궁금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충남 논산 출생. 200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수원시다문화센터'에서 이주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음'으로 단촐하다. 비슷한 류의 시도 한 편 발견했다.

 

 

고인 침을 모아 알약 한 개를 삼키는 시간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딸을 버리고 엄마가 사라지는 시간

 

파도가 집 한 채를 잡아먹는 시간

 

잠복한 형사에게 불법체류자의 꼬리가 밟히는 시간

 

골프채를 휘둘러 창문을 깨부수고 도주하는 시간

 

범퍼에 부딪힌 고라니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떨어지는 시간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넘어가는 시간

 

- 0.2초 / 김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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