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샌. 2018. 8. 24. 20:11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

살구나무에 놀러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요즈음 나도 그런 꿈을 꾼다. 요란스레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달포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다. 서해 바닷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파도 소리 들리고 매일 낙조를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책이나 한 보따리 싸 들고 가서 빈둥거리는 사치를 부린다면 답답한 가슴이 트일 것도 같다. 그런 맑은 빈방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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