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요즈음 나도 그런 꿈을 꾼다. 요란스레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달포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다. 서해 바닷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파도 소리 들리고 매일 낙조를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책이나 한 보따리 싸 들고 가서 빈둥거리는 사치를 부린다면 답답한 가슴이 트일 것도 같다. 그런 맑은 빈방이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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