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손금 보는 밤 / 이영혜

샌. 2018. 9. 4. 11:38

타고난다는 왼 손금과

살면서 바뀐다는 오른 손금을

한 갑자 돌아온다는 그가 오르내린다.

그렇다면 양손에 예언서와 자서전

한 권씩 쥐고 사는 것인데

나는 펼쳐진 책도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

상형문자 해독하는 고고학자 같기도 하고

예언서 풀어가는 제사장 같기도 한 그가

내 손에 쥐고 있는 패를

돋보기 내려 끼고 대신 읽어준다.

나는 두 장의 손금으로 발가벗겨진다.

대나무처럼 치켜 올라간 운명선 두 줄과

멀리 휘돌아 내린 생명선.

잔금 많은 손바닥 어디쯤

맨발로 헤매던 안개 낀 진창길과

호랑가시나무 뒤엉켰던 시간 새겨져 있을까.

잠시 동행했던 그리운 발자국

풍화된 비문처럼 아직 남아 있을까.

사람 인(人)자 둘, 깊이 새겨진 오른손과

내 천(川)자 흐르는 왼손 마주 대본다.

사람과 사람, 물줄기가 내 생의 요약인가.

물길 어디쯤에서 아직 합수하지 못한

그 누구 만나기도 하겠지.

누설되지 않은 천기 한 줄 훔쳐보고 싶은 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보름달이

화투장처럼 잦혀져 있다.

 

- 손금 보는 밤 / 이영혜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 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있다. 그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플랜이 얼마나 완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배낭을 멘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네 인생도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으앙, 하고 첫울음 울 때부터 예정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선택마저도 어쩌면 계산된 과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타고나는 기질에 따라 이미 생의 큰 줄기는 정해져 있다. 그걸 운명이라거나 팔자라고 부를 게다. 우주 법칙이 미시적으로는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지만, 거시적으로는 중력의 법칙 아래 놓여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강바닥의 자갈이 아무리 많아도 도도한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얼마나 미래를 알고 싶으면 손금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을까. 생명선, 운명선, 두뇌선, 재물선, 결혼선, 권력선, 붙인 이름을 보면 인간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설마 신이 이토록 쉽게 천기를 누설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지는 않더라도 두 손을 펴고 가만히 들여다보아라. 오른손은 사람 인(人)자 둘, 왼손은 내 천(川)자가 그려진 무늬가 각별하지 않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간에게 쥐여준 하늘의 당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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