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 복효근

샌. 2018. 9. 12. 10:38

6월 저녁 해 어스름

어둠이 사물의 경계를 지워나갈 때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어두워지는 일이 이리 좋은 것인 줄 이제 알게 되네

흐릿해져서

흐릿해져서 산도 나무도

무엇보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싸웠던 일들도 흐릿

흐릿해져서

개망초 떼로 피어선 저것들이 안개꽃이댜 찔레꽃이댜

안개꽃이면 어떻고 찔레꽃이면 어뗘

개망초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뗘

꽃다워서 좋더니만

이제 꽃답지 아니해서 좋네 이녁

화장을 해서 좋더니

화장하지 않아서 좋을 때가 이렇게 왔네

저녁 이맘때의 공기 속엔 누가 진정제라도 뿌려놓은 듯

내 안에 날뛰던 짐승도 순하게 엎드리네

이녁이라고 어디 다를라고

뭐 죽도록 억울하지는 않아서 세상 다 용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어둠 속에 둥글어진 어깨를 보네

이대로 한 이십 년 한꺼번에 더 늙어지면

더 어둡고 더 흐릿해져서

죽음까지도 이웃집 가듯 아무렇지 않을 깜냥이 될까

모든 일이 꼭 이승에서만이란 법이 어디 있간디

개망초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뗘

꽃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뗘

그때 기억할까 못 하면 또 어뗘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지는 꽃 쪽으로만 마음 수굿이 기울어지던

 

-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 복효근

 

 

밤골에서 살 때가 생각난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는 동네길을 산책하는 게 좋았다. 그때는 저녁 어스름을 정말 사랑했다. 빛이 스러지고 사물들이 무채색으로 변하면서 서로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광경에 마음을 앗겼다. 산책을 안 나갈 때는 거실 창문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저녁 한 시간만으로도 밤골의 의미는 넉넉했었다.

 

서울을 벗어났지만 그래도 여기는 인공 불빛을 피할 수 없다. 저녁이 되면 소음은 더욱 심해진다. 저녁 산책의 빈도는 점점 줄어들고 이제는 창문을 바라보는 일도 없다. 아무래도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감성은 무뎌지고 대신 시비를 따지는 마음은 숫돌에 갈아낸 칼날이 되고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어둡고 흐릿해지는 일이 저녁 어스름 마냥 포근하고 정겹다. 늙어가는 일이 이처럼 넉넉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꽃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뗘 / 그때 기억할까 못 하면 또 어뗘".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다시 한 번 느릿느릿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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