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샌. 2018. 8. 19. 10:55

한때 연분홍의 시절

시절을 기억하는 고약함이여

 

저 나무 아래 내 마음을 기댄다네

마음을 다 놓고 갔던 길을 일테면

길이 아니고 꿈이었을 터 아련함으로 연명해 온

생애는 쓰리더라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

 

더러 돌아오겠다 했네 어느 해질녘엔

언덕에도 올라가고 야산에도 가고

눈 쓰린 햇살 마지막 햇살의 가시에 찔려

그게 날 피 흘리게 했겠는가

다만 쓰리게 했을 뿐

 

했을 뿐, 그러나 한때 연분홍의 시절

꿈 아닌 길로 가리라 했던 시절

 

- 꽃핀 나무 아래 / 허수경

 

 

독일로 간 허수경 시인이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고고학을 공부하러 먼 나라로 가서 남달랐던 시인이었다. 생의 허무와 애상을 노래하고 껴안으려 했던 시인과 고고학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시인의 시 한 편을 찾아 읽어보니 지금 시인에 대해서 가지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안타깝고 애처롭다 할까. 그러나 시인만이겠는가, 나와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삶의 조건이 원래 그러하지 않는가. 특히 한 연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 살아온 길이 일테면 자궁 하나 / 어느 범박한 무덤 하나 찾는 거라면/ 이게 꿈 아닌가"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0) 2018.08.30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0) 2018.08.24
그가 부르시면 / 권지숙  (0) 2018.08.14
밴댕이 / 함민복  (0) 2018.08.09
나의 거처 / 김선향  (0) 2018.08.02